<조선 전쟁 생중계>(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북하우스 펴냄)는 바로 그 호들갑스러운 서술자의 목소리로 조선이 치른 주요 전쟁 장면을 다룬다. 목적은 하나. 박제되기 쉬운 활자화된 전쟁사에 현장감과 생생함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고 한국에서는 좀 더 심한 것 같은데, 전쟁을 공부한다는 건 밀리터리 마니아나 군사주의자로 오해받기 딱 좋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책 소제목을 보다 보면 이런 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전쟁의 배경, 전쟁의 원인, 전쟁의 발발, 그리고 그 다음은 곧바로 전쟁의 결과…. 전쟁 과정이 쏙 빠져 있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시지 빠진 핫도그처럼 허무한 구성이다. 그래서 얼른 전쟁사 책을 찾아보면 이번에는 전쟁의 발발에서 시작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밖에 다루지 않는 또 다른 필터링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현실은 그 두 권의 책을 함께 놓고 봤을 때만 제대로 알 수 있다. 전쟁이란, 정치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학자나 심지어 평화주의자도 군사 문제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외교학과에 가서 외교 공부는 접어놓고 전쟁을 공부하고 온 이유이기도 한데, 이 푸념이 100여 년 전 어느 독일 군사학자가 쓴 책에도 나오는 걸 보면, 전쟁 공부하는 사람이 밀리터리 마니아로 오해받는 사정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 책은 전쟁 전후와 전쟁 자체, 그 두 가지 모두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런 게 특이하다는 사실 자체도 꽤 특이하기는 하지만, 하여튼 이 분야만 놓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생중계라는 형식과 어울려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전쟁의 모습에 굉장히 가깝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쟁의 층위에서도 드러난다. 대전략–전략–전술-개별 병사들의 무장까지, 이 책은 하나의 전투를 다루기 위해 각각 네 개의 층위에서 한꺼번에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런 접근 방식과 생중계라는 형식을 조화시키기 위해 지도와 그림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독일군은 베르됭-뚤-에피날-벨포르 요새 라인을 우회하기 위해 우익 주력 부대를 북쪽의 리에주 요새까지 크게 우회시켰다" 같은 문장은, 전쟁 연구자에게는 너무나 흥미로운 문장일 수 있지만-실제로 나한테는 1년 정도를 쏟아 부을 만큼 흥미 있는 문장이었지만-이 문장을 해독하기 위해 지도를 펼치는 순간 이 텍스트는 더 이상 생중계가 아니게 된다.
▲ <조선 전쟁 생중계>(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
또한 이 책에서 눈길을 확 끄는 부분은 각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개인 장비를 소개한 상세한 그림들이다. 학교에서 전쟁을 공부한 내 입장에서는,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전쟁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는 무기 발달사 내지는 무기 결정론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책은 이 부분 역시 놓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부분을 다른 세 층위보다 우위에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머지 한 층위인 대전략 부분도 충분히 다뤄지고 있다. 본격적인 전투 장면 생중계 전후에 배치된 배경 설명 부분에서는 그 전투에 관한 조선 조정의 논쟁사 등 흥미로는 대목들을 읽어낼 수 있다. 이 네 가지 층위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종종 전쟁 장면을 글로 써야 하는 소설가라는 입장 때문이기도 한데, 소설가뿐만 아니라 아마도 전쟁 장면을 재구성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것들이 창작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될지 쉽게 알아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제일 중요한 부분인 생중계 대목은 꽤 만족스럽다. 속도감을 담당해야 할 캐스터와 사건의 깊이를 담당해야 할 해설자의 역할 구분이나 조화가 대체로 적절하고, 공동 저자인 해설진의 해설 내용도 신뢰가 간다. 다만 첫 번째 장면인 "파저강 야인 정벌"의 경우 장기간에 걸쳐 일어난 전략 층위의 전투를 현장 생중계 형식으로 담으려다 보니 중계 장면과 다루는 사건 사이의 시간 격차가 눈에 띄어서 삐걱거리는 부분이 있었고, 마지막 장면인 "손돌목 돈대 전투"는 사건 자체가 다른 전투 장면처럼 극적이지 못해서 대단원을 장식하기에는 애매했다. 책의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보면, 꽤나 불리한 여건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두 장면 역시 생중계 연출이라는 관점에서는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참고 자료 차원에서는 부족하지 않고, 무엇보다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 사이에 치러진 전투들을 다루는 나머지 장들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점에서, 생중계 형식의 완성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에서 소개된 전투 장면들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병자호란 등 청나라와 치렀던 전투 장면들이다. 임진왜란 때 무슨무슨 대첩이 있었는지는 알아도 병자호란 때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 책을 통해 드디어 그 이유가 밝혀진 기분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전투들이 그야말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말도 안 되는 패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봐도 부끄러울 것 같은 패전, 당사자가 아닌데도 너무나 어이없어 보이는 전투 결과.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조정 역시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그 전투를 없었던 셈 치기로 하고 역사에서 거의 지워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 뒤로 쭉 묻혀 있던 패전의 기록. 이 책은 그 패전의 기록마저 자세하게 생중계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영광스런 승전 기록과 마찬가지 톤으로 호들갑스럽게 중계한다. 이 점 역시 이 책이 지니는 또 하나의 가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오는 전투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손쉽게 세계 전쟁사의 주요 장면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보편적인 세계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좀 더 덧붙여져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그것까지는 이 책의 의무라고 보기 어렵고,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라고 해 두는 편이 공정할 것 같다. 다루는 내용의 한계가 명확한 게 반드시 단점은 아니니까.
활자 위의 전쟁을 생동감 있게 재구성해냈다는 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을 열심히 그려냈다는 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패전의 스토리들을 흥미롭게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의 형식과 내용은 꽤 흥미롭다. 특히 창작자라면, 소장해 두고 참고할 만한 가치도 있다고 본다. 단, 이 책을 최종적으로 참고할 모범답안으로 보기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자기만의 공부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보는 편이 좀 더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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