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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치킨' 좋아한다 MB 말하자 오바마는…

[프레시안 books] 김진묵의 <흑인 잔혹사>

김진묵의 <흑인 잔혹사>(한양대학교출판부 펴냄)는 말 그대로 흑인이 세계 역사에서 겪어 온 고난을 정리한 책이다. 재즈와 민속 음악을 주로 평론해왔던 저자의 개인적 관심에 의해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현대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뿌리라 할 수 있는 재즈와 블루스가 가진 '감성적 힘'에 집중하고 그 원류가 바로 흑인이 지닌 '고난의 역사'에서 축척된 슬픈 감정이라는 확신으로 출발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책은 제국주의가 시작되던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을 시작한다.

저자는 15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르네상스 이후로 새로운 방식의 문명을 도모하던 유럽의 열강들이 바다로 나아가게 되는 대항해 시대를 책의 맨 앞에 배치했다. 따라서 책은 "바다를 점령하는 자가 세계를 점령한다"는 특유의 탐욕스러운 팽창주의를 다루면서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서 가려졌던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일종의 폭로 방식, 즉 '다시 쓰는 세계사'의 외형을 띠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제국주의의 만행과 관련된 방대한 에피소드가 자극적인 사실 묘사와 함께 등장한다. 그 동안 역사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개척 정신의 발현으로 추앙해왔지만, 사실 그는 단지 유럽 열강의 탐욕을 앞서 실천한 자였을 뿐이라는 사관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대륙 점령의 전초기지였던 서아프리카에서의 각종 만행을 나열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많은 흑인들이 유럽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장면부터 점점 첨예해진다. 저자는 '관보다도 좁고 어두운' 선실 맨 밑 칸에 갇혀서 한 달이 넘는 항해를 견디며 미지의 세계로 팔려가게 되는 흑인의 심정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것을 묘사하는 문장 하나하나를 매우 극적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서술은 새로운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뒤부터 흑인이 겪는 고난과 합쳐지면서 비로소 저자가 의도한 바를 확실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 <흑인 잔혹사>(김진묵 지음, 한양대학교출판부 펴냄). ⓒ한양대학교출판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중반부는 아직 독립되지 않아 여러 개의 식민지로 갈려 있었던 미국의 초기 모습부터 열강의 의도와 목표에 따라 변해가는 노예 제도의 변천을 꽤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을 거쳐 어떻게 점점 흑인의 인권이 개선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통시적인 사실 관계에 입각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 에피소드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어,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노예로서의 흑인의 삶에 대해서 일인칭 시점을 사용하며 깊숙이 감정을 이입하게끔 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저자는 그가 처음에 가졌던 감정의 원류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이 책은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정보 전달 이외에 다른 뚜렷한 '목적'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흑인이 어떤 방식으로 아메리카로 건너오게 되었고 어떠한 사건과 제도를 통해 점점 인권을 성장시킬 수 있었는가를 연대기적으로 명시하여 사관을 돌출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서의 방식이라면, 이 책은 미국의 흑인이 탄생시킨 재즈와 블루스의 태동을 가능케 했던 '감정적 원류'를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다소 감정적으로 과잉되어 있고, 그것은 <흑인 잔혹사>라는 제목과도 잘 어울린다.

저자는 "재즈와 블루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란 명제를 먼저 떠올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흑인의 고난을 끌어왔다. 그러나 재즈와 블루스가 갖는 슬픔의 정서, 즉 구체적인 상을 도출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와 연관된 개념이 역사적 서술과 만나는 순간, 역사 자체는 자칫 흐릿해질 수 있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

흑인의 감정을 담은 재즈가 흑인이 겪은 고난으로부터 발현했다는 확신에 찬 가정으로 인해 실제로 어떻게 해서 흑인 영가가 도입이 되었고, 재즈와 블루스뿐만 아니라 흑인 문화 전반이 흑인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자리를 잃는다. 특히 현재 미국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흑인들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 어떤 사실에 근거해서 점진적으로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역사를 이루는 것은 사실 수많은 사건의 연결 고리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공통된 심리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나 확신이 역사 서술에 먼저 개입되면 이는 의도하지 않게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는 책의 앞부분 개빈 멘지스의 정화 함대 이야기에서 극대화된다. 멘지스는 인도양까지 나아갔던 중국인 정화가 사실은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연구한 사람으로, 이 내용을 다룬 <1421>은 출간 당시 주제의 파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도출된 역사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 상태다.

하지만 영국의 한 유사 역사학자가 만들어 낸 판타지는 극동으로 흘러 들어왔고, 흑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전해진 백인 중심의 역사에 의문을 던지고 싶었던 재즈평론가–역사 비전공자–에게 유혹적인 사료가 되고 만 것이다. (자국과 가까운 나라의 전통과 역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자국의 위치를 점검하려는 태도 역시 내셔널리즘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한 지점은 <흑인 잔혹사>라는 연구의 성과가 추구하는 방향이 한 인종을 범주화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접근은 인종을 비롯해 차별과 평등에 대해 담론을 구성하는 요소를 설명하는 데에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정 인종에게 콤플렉스가 아닌 것은 말해도 되지 않느냐고, 괜찮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인종주의 담론이 추구하는 방향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즉, '나는 너희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그들을 범주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다. 설사 그 범주가 '착한' 것으로 규정된다고 해도 '범주화' 자체가 가진 속성이 이미 인종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기준으로 오인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저자가 흑인의 잔혹사를 서술하고, 미국의 흑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애석하지만 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는 얼마 전 있었던 이명박과 버락 오바마와의 대담을 연상하게 한다. 방미 중 이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나도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한다"며 그를 흑인으로 범주화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은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관점에 대해 저자를 탓할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흑인 음악에 유독 많은 애정을 쏟으며 한 평생을 바쳐 온 저자의 감성 역시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그가 살아 온 시대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TV를 켜면 아직까지 코미디언들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고, 그것을 보며 즐기는 수많은 시청자가 있는 나라에서 이 책은 하나의 과도기적 연구 사례로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흑인 잔혹사>는 흑인이라곤 단순히 노예로서의 고초를 겪으며 성장해 노래를 잘하거나 농구를 잘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힘들게 사는 부류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대중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상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럽의 탐욕이 부른 약탈과 만행으로 제국주의를 설명하고 미국이 성립되던 과정에 흘렸던 많은 피를 사례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에, 확실히 그 역사가 기억에 남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소위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민감한 것을 민감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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