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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e편한' 아파트보다 이런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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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e편한' 아파트보다 이런 집을!

[프레시안 books] 노석미의 <서른 살의 집>

얼마 전 부모님이 집을 지었다. 원래 지어져 있던 집에 한 층을 더 얹은 것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집을 '지은 것'은 아니고, 아빠는 여전히 직장을 다니며 원래 살던 곳에서 20분 정도 더 시골로 들어갔을 뿐이니 '귀농'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생활을 버렸다는 것만으로 많은 게 바뀌었다.

마당이 생기면서 난생 처음 기르게 된 강아지 두 마리는 같이 산 지 두 달 만에 가족의 모든 화제를 독점했다. 주말을 맞아 집에 내려간 아침, 나는 아빠와 함께 강아지 산책을 다니면서 감과 밤을 주웠고, 이 열매들이 성실하게도 가을 내내 주렁주렁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주 한 주 새로이 피는 꽃들을 보며 들꽃의 가짓수에 감탄했고, 해가 떨어짐과 동시에 어둠에 잠식되는 동네에서 밤의 위력을 깨달았다.

사는 터전이 바뀐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감탄할 것들이 넘쳐나고 도심에서 살 때는 생각지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난다. 자연은 부지런히 하루하루 모습을 바꾸었고, 그래서 길은 아무리 걸어도 같은 길 같지 않았다.

<서른 살의 집>(마음산책 펴냄)은 서울 토박이인 화가 노석미가 서울을 떠나 결국 자신의 집을 짓기까지 거쳤던 곳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업실 겸 집을 찾기 위해 거쳤던 집들을 그녀는 '변두리 집들'이라고 표현한다. 양평, 포천, 동두천 등 경기도에 자리한 그녀의 집들을 변두리라고 말해도 되는지 지방 출신인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그 표현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이나 역과는 한참 떨어진, 집배원이 마을의 모든 집들을 다 아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새로 온 아가씨에 대해 수군거리는, 화장실과 목욕탕이 집 밖에 있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그런 집들이었기 때문이다.

▲ <서른 살의 집>(노석미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서른 살의 집>은 그녀가 서울을 떠나 낯선 마을에서 혼자 살기로 결심한 이후 겪은 에피소드를 나열한 책은 아니다. 물론 집을 소개해준 인상 좋던 청년이 사실은 술집 아가씨를 관리하는 조폭이었다거나, 맥주를 마시자고 '꼬시던' 스님의 이야기 등 변두리이기 때문에 맞이하게 되는 사건들은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서른 살의 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에 등장하는 네 채의 집들에 대한 정취를 묘사한 부분들이다.

사실 '집'이라는 말은 얼마나 요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늦은 오후 집안을 둘러싼 편안하고 안온한 공기, 어린 시절 머리를 부딪치곤 했던 오래된 서랍장의 모서리, 따끈한 방바닥에 귀를 대고 누워있으면 들려오던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엄마 아빠가 늦게 돌아오던 밤, 창가에 비치는 낯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무서운 눈동자처럼 느껴졌던 기억.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는 전세 생활을 오래 했고, 아빠는 신문을 보고 엄마는 과일을 깎으며 온 식구가 하하 호호 하는 풍경보다는 냉랭하고 어색한 공기가 더 자주 흘렀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나 나른하고 따뜻하다.

물론 스무 살, 대학교 입학과 함께 상경해 자취 생활을 시작하고 직장 생활 3년 차에 접어든 지금의 내게 집은 부담감과 경외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한다는 말은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같이 느껴지고 다달이 내는 월세가 아깝지만, 사실 보증금을 마련해 준 부모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다세대 주택에서도 살 수 없었을 거다. 어느 구, 어느 동에 산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나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누설한다는 사실은 종종 나를 짜증나게 하고, 남자 친구네 집에서 신혼집을 마련해주기로 했다는 친구를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럽다.

<서른 살의 집>을 TV에서 보여주는 연예인의 호화로운 집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막힘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집 이야기가 삶에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석미는 각각의 집에 대한 첫인상을 친구 얼굴처럼 묘사하며 공간들에 대한 애정을 담뿍 드러내는 한 편 '집'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돈이 부족해 오빠에게 손을 빌려야 했던 일, 집 주인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해야 할 때 겪었던 서러움, 동두천 외곽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신도시에 올라가는 아파트들을 바라볼 때 갖는 박탈감 등에 대해서 말이다.

서른 살, 처음 '혼자 살이'를 시작한 후 이제는 마흔에 접어든 그녀의 10년에 걸친 집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 세대 중 상당수가 선택해야할지도 모를 대안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 계발서보다 훨씬 든든한 가이드북이다.

우리에겐 모두 집이 필요하다. 내 물건과 자취를 담아둘 수 있고 가장 편하게 몸을 눕힐 방 한 칸이 있고, 같이 사는 사람은 없더라도 날 맞아줄 고양이 한 마리쯤은 거두어 먹일 수 있는 집이. 하지만 그 집이 꼭 분양 광고 속 아파트 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노석미는 <서른 살의 집>을 통해 말해준다. 집처럼 다정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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