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앞면의 "불, 요리, 그리고 진화"란 구절과 "요리하는 자, 지구를 지배하다!"를 보아도 과학 책인지 음식 문화에 관한 책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Catching Fire"란 원제와 리처드 랭엄이란 저자를 보면 아주 명확해진다. 과학 책이다. "불 피우기"는 인간이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것을 뜻할 것이니 랭엄이란 과학자가 일찍이 제인 구달의 연구 캠프에서 곰베의 침팬지를 연구하고 '인간 진화 생물학'이란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니 인간의 화식(火食) 기원에 관한 책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처음 보는 책을 가지고 이리저리 그 내용을 추론하는 일 또한 즐겁다.
그렇다. 이 책은 시종일관 인간의 화식은 언제부터 기원했으며, 어떤 이점들이 있었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음식 문화에 관한 어떤 문화사적 지식이나, 요리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 독자라면 실망할 수 있는 내용이다.
화식과 요리를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음식의 재료를 불에 익히는 것은 요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반찬을 해먹지만 그 행위는 너무 익숙한 것이라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 불에 익혀 먹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 <요리 본능>(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더군다나 고기와 생선을 날로 즐기는 우리네는 가끔은 불에 익히는 것은 요리 과정에서 제외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분명히 쌀을 씻어 물을 붓고 불을 맞추어 밥을 짓지만 밥을 하는 것과 감자를 쪄서 먹는다고 할 때 이를 우리의 머리로는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 않다. 요리란 무언가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만 뜻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의 들머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생식(生食)을 떠올리는 순간, '정말 불에 익힌다는 것은 뭐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두들긴다. 요즘 일반적인 생식이란 건강을 위해 곡물과 다른 여러 것을 말려서 가루로 내어 그대로 물에 타서 먹는 것을 뜻한다. 그저 일종의 상업화된 건강식인 셈이다.
생선이나 고기를 회로 먹거나, 채소와 과일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거나, 양념을 준비해서 쌈을 먹는다는 것은 생식이 분명하지만, 이를 구태여 생식이라고까지 하지 않고 분명히 요리의 범위에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요리의 본령에서 불에 익힌다는 것은 핵심적인 일인데도 요리의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랭엄이 생식의 예를 들자마자 불에 익힌다는 것이 요리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랭엄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장은 불에 익혀서 먹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의 사용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커다란 특징으로 규정짓고 있지만, 사실은 화식의 중요성을 잊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랭엄이 이 책에서 강조를 하지 않았어도 화식만큼 우리 삶에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다. 랭엄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의 화식 습성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행해진 것이며, 그 화식이 두뇌의 발달과 같은 진화에 있어서 인간의 특징을 갖추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화식 역사를 우리가 보통 인정하는 20만 년 전이나, 보다 늘려 잡는다고 해도 50만 년 전 또는 70만 년 전보다 훨씬 이전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약 400만 년 전쯤에 이 지구상에 나타났으며, 호모 하빌리스는 약 250만 년 전에, 직립 원인이라 부르는 호모 에렉투스는 약 190만 년 전에 이 땅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랭엄은 화식은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교체기인 약 200만 년 전으로 그 연대를 끌어올리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상의 발굴 연대보다 훨씬 더 앞당겨 잡고 있는 것이다.
랭엄은 그 근거를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지 않는다. 호모 하빌리스에서 직립 원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두뇌 용량의 확장되었으며, 그 원인으로 화식이 일반화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들이민다. 곧 생식의 경우에는 먹이의 양에 비해 소화해서 흡수율이 낮고, 소화의 과정에서 에너지 손실이 크기 때문에 이 전환기에 두뇌 용량이 그렇게 커질 수 있는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이때의 턱뼈와 이빨 등은 이미 화식에 적응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해부학적 근거가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익혀 먹은 증거들이 100만 년이 넘는 세월에 쉽게 훼손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랭엄이 들이미는 이 증거들이 유적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보다 화식의 기원에 대해서는 더 명징한 해석이 될 수 있다.
특히 먹이의 변화에 따른 핀치의 부리 변화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예로 직립 원인의 해부학적 특성이 이미 화식에 적응한 형태라는 설명은 머리가 저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놀라운 혜안이다. 앞으로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화식의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유전자 분석의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다면 아마도 우리 유전자의 화석화된 DNA 속에서 화식 기원에 대한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태여 랭엄이 소화와 영양분 흡수라는 화식의 이점과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이것 말고도 익혀 먹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점들이 있다. 랭엄의 말대로 불에 익혀 먹음으로 미생물의 감염 예방과 재료에 있을지 모르는 독의 완화, 짧은 식사 시간과 소화 시간과 같은 것들은 정말 생존에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고 인간 진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폭넓은 음식 재료의 확보가 가능해졌을 수 있다. 날로는 먹기 힘든 재료들이 열을 가해 본디 재료에 있던 먹기 힘든 속성을 완화시켜 음식 재료의 범위를 넓혀줬을 수도 있다. 음식의 재료가 다양해졌다는 것과 익혀 먹음으로 적은 음식으로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음을 뜻한다.
불로 익힌다는 것은 음식 재료에 있는 수분과 미생물을 제거해서 음식물의 보존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사실 햇빛에 말리는 행위도 일종의 화식으로 볼 수 있겠다. 고기나 씨앗과 과일을 말리면 보존 기간을 훨씬 늘릴 수 있다. 음식을 비축할 수 있다는 것은 먹이가 부족한 철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생존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식과 요리가 인류의 진화와 생존에서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랭엄이 이 책에서 요리를 생각하는 방식은 너무도 단순하다. 굽거나 찌는 단순한 화식만을 요리의 범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다양한 도구의 사용이 입증되지 않는 면에서는 타당한 추론이기는 하나, 사실 요리에서 중요한 것은 익히는 것만이 아니다. 수렵과 채취에서 나온 음식 재료들을 분류하고, 껍질을 벗기거나 말리거나 가루로 만드는 가공을 하고, 다시 이들을 섞고 조합하는 과정이 모두 요리이다.
사실 화식을 할 만큼 두뇌가 발달했다고 하면 부족한 도구일지라도 이런 요리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다. 농경의 시작은 1만 년 전에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용 식물들의 군락을 돌보는 아주 긴 세월을 거쳐서 이룩된 것이다. 가축도 마찬가지로 섬세한 분류와 동물들의 생태를 인지하고 난 다음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에렉투스라 하더라도 갑자기 늘어난 두뇌의 힘은 화식뿐만이 아닌 전체 요리의 형성 과정을 겪게 했음을 추론하는 것은 그다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후반부에 현존하는 수렵 채취 부족들의 사례로 들며 이야기한 화덕 중심의 여자와 가족 관계를 묘사한 대목은 견강부회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존하는 원시 수렵 채취 부족들은 어디까지나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다. 호모 에렉투스의 생활을 추론할 유물의 부족은 인정할 수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수렵 채취 생활을 호모 에렉투스에 무조건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집단 생활의 사회 상황이란 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계절 별로 가용할 수 있는 음식 재료나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의 종류에 따라 사회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재조합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유인원인 침팬지의 사회라 할지라도 환경에 따라 다른 구조가 되었다는 사실은 각지의 침팬지들의 속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더군다나 호모 에렉투스가 처해 있던 환경과 현대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환경은 같을 수 없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조차 다르다. 상황이 다른 사회의 습속을 환치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에렉투스에게 모두 적합지 않다.
호모 에렉투스의 생활에 대한 증거의 부족은 인정하지만, 그보다 더 앞선 공룡의 시대를 생물학적 지식과 고지질학이나 환경의 연구를 통해 촘촘하게 재현하듯이 호모 에렉투스의 시대도 그 당시로 되돌아가 여러 정황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그들의 도구와 주거, 그리고 유골을 통해 다시 재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존 수렵 채취 부족의 상황은 200만 년이 더 지난 상황이다. 그동안에도 진화의 시계는 사정없이 돌고 있었을 것이며, 정황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상황으로 미루어 추론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작정 그 현실을 호모 에렉투스의 상황으로 치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일생 동안의 관찰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는 랭엄의 혜안이 이 책의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다. 침팬지와 인류학 연구를 통해 또 다른 인간 진화 생물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답다는 생각이 든다.
랭엄이 1972년 캠브리지 대학원생이던 시절 탄자니아 곰베에서 침팬지를 처음 연구할 적에 제일 처음 관심을 가졌던 일이 '바나나의 공급이 침팬지 집단의 크기에 미치는 영향'이었으며, 이 책에서 곳곳에 드러나듯이 침팬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침팬지들이 즐겨 먹는 것들을 자신도 똑같이 먹으면서 생활하려 했던 아주 열성적인 학자였다. 그것도 원래는 숲 속에서 침팬지들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로 수행하려다 무슨 이유에선가 포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본디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으며, 인간이나 동물에게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처음부터 깊이 깨닫고 있는 학자였다. 과학자라면 한 번 의문을 품은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들어 책을 한 권 쓸 정도는 되어야 과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탄자니아의 호숫가에서 벌거벗은 채로 침팬지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침팬지처럼 나체로 숲 속에서 지낼 생각을 했던 랭엄을 상상하면서 이 책을 읽는 일에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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