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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 택시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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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밤, 택시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프레시안 books] 김숨의 <노란 개를 버리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것은 갓 대학에 입학해서였다. 그전에 연극이라고는 성탄절에 성당에서 또래 친구들과 모여 우리끼리 만들고, 보고 한 것이 고작이었다. 홍익대학교 앞에 제대로 나와 본 것도 처음이라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때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클럽을 찾다가 같은 자리만 세 시간을 빙글빙글 돌며 헤매다 정작 공연은 20분밖에 못 보고 돌아갔던 걸 빼고는.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홍대 앞에서의 첫 문화생활을 즐기러 나서는 그날의 설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연극을 열심히, 그리고 꼼꼼하게 보고 나서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내가 그 연극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 귀여운 허영이 남아 있던 시기였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이야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숨겨진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그 작품을 이해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고 산울림 소극장을 빠져나오는 계단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그날의 술자리에서는 안석환 씨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 정도가 오고 갔을 것이다.

내가 그 연극을 다시 본 것은 졸업 무렵이었다. 지나 보니 삶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었다. 부조리하기로 치자면 <고도를 기다리며> 저리 가라였고, 도무지 소통이라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나는 그 연극을 보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서글픈 감정에 조금 위로를 받았다.

연극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일으키는 내 안의 감정이 나를 위로하는 것. 그것은 신비한 경험이었고, 그래서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좋아한다.

김숨의 작품을 읽을 때도 나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건 좀 끔찍하다. 김숨의 언어는 연극보다 더 선명하다. 김숨의 작품 속 인물들의 벌어진 입속에는 벼락처럼 선 혀나 노란 개의 눈알이 들어 있기 일쑤다. 나는 가끔 책을 읽다가 그들의 입 냄새를 맡기도 한다.

사물들은 또 어떤가. 내가 옷장을 열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은 벨트다. 그건 벨트를 뱀으로 묘사한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숨의 작품은 이렇게 선명하게 내 감각에 남아 있는데, 그 작품의 줄거리를 말해보라면 좀 난감해진다. 그러니 그냥 읽어보라는 수밖에.

그런데 이번 장편 소설에서 나는 처음부터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백치들> <철> <물> <나의 아름다운 이웃들>처럼 명사형이었던 지난 장편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노란 개를 버리러>(문학동네 펴냄)라는 꽤 구체적인 서술형의 제목이 아닌가. 그러자 나의 오래된 습관이 고개를 들었다.

▲ <노란 개를 버리러>(김숨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왜 노란 개를 버리는 걸까?' '노란 개가 뭘까?' 어쩌면 이건 내가 키우는 얼굴이 노란(몸통은 까만) 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맹목적으로 날 원하는 작은 짐승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도 모르게 '왜?!'가 불쑥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그러나 첫 장을 펴는 순간 여지없이 그 질문은 풀썩, 주저앉아 날아갔다.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일랑 집어치우고 잠자코,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그들의 택시에 동승하는 것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택시의 뒷 자석, 밤의 손님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내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무수한 반복, 반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의 삶이 목적지를 확신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달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그 택시 안이 그토록 불안하고 불편한 것인지도. 마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양 궁지에 몰린 비루한 삶에서 불안은 가스 불 위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주전자의 소음처럼 끈질기게 따라붙기 마련이다.

죽음의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 있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유령 같은 모습으로 택시를 타고 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언젠가의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한밤에 서대문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짐작하듯이, 우산은 없었다. 택시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 밤이었다. 일단 걷기로 작정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택시 한 대가 내 옆에 섰다.

'빈 차'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조수석엔 한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절박해질 대로 절박해져 뒷자리에 올라탔다. 여전히 '빈 차' 빨간불을 켜고 택시는 빗속을 달렸다. 중년 여자는 아마도 택시 기사의 아내로 짐작되었지만, 내가 목적지를 내뱉은 이후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그들의 배려이거나 그들을 위한 나의 배려였을 것이다.

공포가 소설을 쓰게 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이렇게 떨쳐버릴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그래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반복되는 허무가 내일을 또 기다릴 수밖에 없이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비루한 일상의 불안과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며, 책장을 덮으며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든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목동이 있다면, 버려진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언제든 깨어 있으라고 했던 밤의 손님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고 눈을 감고 있다면, 우리는 노란 개를 버리러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길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그저, 잠자코 택시에 올라타는 수밖에. 너무 냉소적이라고? 그래도, 그것 때문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어떤 진리보다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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