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거리로는 이미 피자나 중국 음식을 주문했고 느긋하게 기대고 앉아서 배달되기만 기다리면 된다. 콜라며 맥주며 각자가 원하는 음료를 고르고 나면 봇물이 터진 듯이 떠들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각자의 연구에서 얻은 결과며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지도 교수가 쓰고 있던 책의 내용에 대한 의견이었고 때로는 바이에른 뮌헨과 헤르타 BSC의 골득실에 대해서, 혹은 발락의 멋진 골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요아힘 페르나우의 삐딱한 냉소나 아이헨도르프와 릴케의 시로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떠들다가 보면 시간은 언제나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울리히 뵐크는 그런 금요일 저녁 모임에 가끔씩 모습을 보이곤 했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역할을 즐기던 그는 사실 우리 연구 그룹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금요일 저녁의 도서실 저녁 식사 시간, 모두가 한창 열을 올리며 떠들어 대고 있을 무렵이면 언제부터인지 한 손에 책을 들고 우리 곁에 앉아 있었다. 우주를 한바탕 들었다 놓고 모임이 끝나갈 무렵이면 조곤조곤 이야기 하며 만족한 표정의 그가 일어서서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갔다.
뵐크가 작가라는 사실은 그가 연구소를 떠날 무렵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천문학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의 사랑스러운 딸 슈텔라(Stellar, 라틴어로 별이라는 뜻이다)와 동행하며 펼쳐놓는 우주와 우리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 <별이 빛나는 밤 : 아빠와 함께 하는 천문학 여행>(울리히 뵐크 지음, 전대호 옮김, 봄나무 펴냄)이다.
▲ <별이 빛나는 밤>(울리히 뵐크 지음, 전대호 옮김, 봄나무 펴냄). ⓒ봄나무 |
펼쳐들고 3초 만에 잠들어 버리거나 구석에 처박아 두어서 먼지가 쌓이기 쉬운 건조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동화를 읽어주듯이 아이에게 다가가는 그의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재미있는 책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책에 가깝고 각각의 주제에 따라오는 천문학적 설명들은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읽으며 천문학과 물리학의 세계를 탐험하는 쏠쏠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 길의 시작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하는 데서 시작한다.
천문학자인 아빠는 슈텔라가 자기만의 별, 즉 행운의 별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망원경을 선물한다. 자신의 별을 찾으려는 아이를 위해 아빠는 겨울부터 시작해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온갖 호기심과 질문을 감당한다. 아이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아빠의 따뜻한 마음은 지붕꼭대기에서 월식을 보려고 기다리다 잠든 아이를 안고 깨어나길 기다리고, 카나리아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로 해시계를 만들게 하고, 아이의 관심을 끌기위한 주도권 다툼에서 스벤과 '경쟁'하며, 내비게이션 시스템보다 조금 덜 똑똑해 보이게 한다. 이 모든 노력은 단순히 과학이, 특히 천문학이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게다. 그는 딸이 바라보는 우주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함께 경험하고 싶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길을 오래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신의 별을 찾으려 애쓰는 슈텔라와 친구 베리트는 아빠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자신의 별에 다가가고, 두 아이들의 엄마들은 몰래 전한 쪽지를 통해 '자신의 별은 바로 자신 스스로'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자신만의 이해와 상상력으로 두 아이들을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만드는, 친구 베리트의 오빠 스벤의 역할도 재미있다. 행운의 별이 없다는 스벤의 말에 아이들이 슬퍼하자 "우리가 아는 별이 워낙 많아서 자기의 별을 가질 수 있다"며 아버지이자 천문학자로서 아이들이 충분히 믿을 만큼 그의 말이 권위가 있는지 긴장하면서 스벤과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박장대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 바라보며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행운의 별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아이들은 경쟁하기를 좋아한다. 과학의 진리는 영원하고 시간과 무관하지만 그 진리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 되려는 명예욕이 없는 과학자는 없다. 과학자들이 하물며 그런데 아이들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과학자들이 끝내 철이 들지 않아서 경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아이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시작하는 천문학으로의 여행이다. 굳이 어렵고 복잡한 수식들이나 개념들을 나열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에 비친 것들을 이야기하며 동행한다. 혼자 가라고 내몰거나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그리고 기다리며 바라본다. 거기서 천문학의 이런 저런 이야기며 자연의 엄격한 법칙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저 빵 사러 나가려고 지갑을 주워들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한다.
부활절 달걀은 봄, 즉 생명의 탄생을 말한다. 오랫동안 잠을 자던 자연이 봄이 오면 깨어나듯이 달걀 속에서 새 생명이 생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옛날에 태어난 거야. 지금도 새 별이 태어나고 있어. 까마득한 과거에는 별들이 없었어. 우주도 영원한 과거부터 늘 있었던 것은 아니야. 지금은 늙었지만 한때는 어렸어. 심지어 갓난아기 같을 때도 있었어. 식물이 씨에서 자라나듯이 우주도 자라나서 결국 생명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우주에 살고 있다.
그의 교육 방식은 엄격하고 원칙적인 자연법칙과는 다르다. 교육자로서도 엄격하지 않을뿐더러 원칙들을 고수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주유소 매점에서 연료비를 지불하려고 신용 카드를 꺼냈을 때 슈텔라가 사탕 봉지를 들고 계산대 옆에서 어슬렁거리면 그는 또 원칙을 저버리고 만다. 주유와 사탕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다짐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사탕을 사주지 않아 훌쩍거리는 아이와 함께 차에 올라타며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꺼내 든 것이 자연법칙의 원칙성이다. 자연이 원칙을 따른다는 사실로부터 천왕성의 궤도가 많이 찌그러져서 있음을 발견하고 그 원인이 해왕성의 인력이라는 것을 통해 해왕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문학자들은 자연법칙의 도움으로 행성의 위치를 발견했으니 자연법칙이 없었다면 이런 사실들을 전혀 몰랐을 것이고 해왕성도 발견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대해 슈텔라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계산대 옆에 있던 고무공이 해왕성보다 더 예뻤어."
여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런 경험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려는 노력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일이다. 우리 어른들을 감탄시키는 것들에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누가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멋진 경치 앞에서 감탄하며 혀를 내두르지만 아이들은 오로지 해변의 아이스크림 장수만 바라본다. 우리는 테니스 경기에서 기막힌 백핸드 발리에 탄성을 내두르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볼보이가 될 수 있는 지 묻는다. 하지만 아이는 단순하고 정확한 문장을 어른보다 더 잘 구사한다. 순수함으로 우주를 향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를 갖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싶을 만큼 외로움을 느낀다.
슈텔라에게 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를 낳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한 해가 지났다. 한 해, 한 달, 한 주, 한 시간은 모두 천문학적으로 정해진 양이다. 더 나아가 시간 자체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시간 자체는 무엇일까 ? 아마도 이것은 가장 어려운 물음일 것이다.
아빠는 무슨 소원을 빌었어?
더 많은 시간.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너와 함께 보내고 싶어.
그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 슈텔라를 바라보는 그는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아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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