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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이문열'을 싫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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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람들은 왜 '이문열'을 싫어하나?

[남승원 '이문열'을 말하다] <리투아니아 여인>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문열의 장편 <리투아니아 여인>(민음사 펴냄)을 앞에 두고 책꽂이를 훑어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책은 <변경>(전12권, 문학과지성사 펴냄) 5권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일이 거의 없는데, 한 번 손에 든 소설을 끝까지 읽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시 '이문열'이라는 이름과 마주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꽤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대책 없이 우울하기만 했던 1980년대 후반 중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도피처 역할을 해준 남산자락의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이문열의 '이야기'들은 당시 내 인생처럼 약간은 어둑하고 침침했던 그 도서관의 서가에 비춰든 햇살과도 같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 대체 이문열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또 세기가 바뀌는 동안 한 작가와 독자들 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져 왔던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글은 할애된 지면에 매우 부적절하게도 그간 이문열 소설을 외면해 온 이유를 뒤늦게나마 스스로 찾아 나선 장황한 변명의 기록이 될 듯하다.

그와 같은 연배의 작가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문열은 현재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이름은 <사람의 아들>(민음사 펴냄)이나 <황제를 위하여>(민음사 펴냄) 내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 등 주로 1990년대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이나 <삼국지>, <수호지> 등의 평역 작품들과 보다 결부되어 있다. 이 시기 그의 몇몇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리거나 영화·연극으로 각색되고 또한 상업적 성공과 맞물리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기 시작한 면도 있다.

▲ 이문열. ⓒ연합뉴스
하지만 그는 <영웅시대>(민음사 펴냄)와 <변경>으로 이어지는 대하 소설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굴곡진 삶의 인생들을 작품 세계의 가장 근원이자 중심에 두고 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작가의 실제 삶이 우리의 불행했던 현대사와 밀접하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줄 만하다.

또 <오디세이아 서울>(민음사 펴냄)을 통해 "졸부에서부터 운동권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과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전전하면서 1992년 서울의 세상살이를 입심 좋게 그려내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항상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직접적인 사회 현실 한 가운데 위치시키고자 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디세이아 서울>의 경우만 해도 1992년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지는 개별 독자들 판단의 몫이겠으나,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이 작품이 '1992년'을 관통하고 또 결국 그 시기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소설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힌 대로 '외제 만년필'이 관찰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제로는 아무런 내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 현실을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 오히려 그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나아가 '이문열'이라는 이름을 현재 진행형으로 인식시키지 못하는 데에는 작품의 어떤 내재적 요인이 있지는 않을까.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無理念)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 미덥다.

우리는 분열된 세계 제국의 변경인이다. 이 두 세계 제국의 뿌리를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에서 찾든, 너무 익은 서유럽 문명의 자기분열로 보든, 우리는 오랫동안 그 제국의 판도 밖에 있었다. 그러다가 이 세기에 와서 겨우 그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이번에는 단순한 주변이 아니라 변경이었다. 주변과 변경을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그저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있을 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 경계선 너머 또 다른 적대 세력 또는 세계 제국이 존재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변경에 제국이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것이 변경의 확대를 위한 것이건, 유지를 위한 것이건, 제국이 가장 힘주어 그 원주민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적대의 논리다. 결국 당신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와 소비에트로 표상되는 두 제국의 적대 논리 내지 그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당신들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변경> 2권, 215쪽)

다소 길게 인용했지만 <변경> 속 위의 구절에는 이문열의 작품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중심 논리이자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주변'과 '변경'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변경'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미 제국에 의해 오염된 것이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행해지는 노력조차 제국이 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무성한 전망'보다는 '결여된 전망'이 오히려 바람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문열의 소설은 '제국'이 만들어내서 퍼뜨리는 모순된 현실을 정확히 응시하고 살아가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무능력함을 이지적 논리로 포장한 존재가 전면화되어 이끌어간다. 따라서 이문열의 작품은 <황제를 위하여>(민음사 펴냄)의 '백제 실록'이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예수'처럼 비록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나 심지어 허구적인 것일지라도 변화무쌍한 현실을 벗어나 존재하는 하나의 완벽한 논리와 대응될 때만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도 아니라면 평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견디며 생명력을 가진 논리의 수정·보완을 통해서만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사실 이문열의 소설 세계를 몸 바꾸며 이끌어 가는 존재가 현실과 유리된 허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존재가 구체적 현실에 던져지는 순간, 오히려 우리가 애를 쓰며 살아가는 현실의 모든 의미들은 순간 무화되고 만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리투아니아 여인>은 앞서 다소 장황한 과정을 거쳐 언급한 '이문열적 시선'이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한 여인의 삶과 고민을 만나 그것을 어떻게 소거해나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 <리투아니아 여인>(이문열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 작품 안에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삶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먼저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전쟁고아로 미군에게 길러지다가 결국 미국으로 입양을 가서 그곳의 여자와 결혼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살고 있으나 자식이 혼혈로 인해 차별을 받자 다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리투아니아' 계 미국인으로, 몰락한 백작 가문의 미망인이 우리의 근현대사 못지않게 굴곡진 '리투아니아'의 현실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 오면서 유일하게 데려 온 세 딸 중 하나이다.

사실 이들은 작품의 주인공인 '혜련(헬렌)'의 부모들이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와 또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이라고 본다면 이들이 결국 주인공을 움직이는 소설의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 메트로폴리탄적 삶의 방식이 널리 퍼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인 혜련과 또 혜련의 입을 빌려 듣는 그녀의 가계(家系)는 오히려 소설 내에서 가장 구체성을 갖지 못하고 에피소드들로 나열되고 만다. 그것은 애초부터 '이문열적 시선'으로 등장하는 화자이자 관찰자인 '나'가 어릴 때부터 가졌던 단순한 호기심이 불러 낸 이야기 수준에서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인공의 이야기이면서도 현실을 딛고 선 생동감을 갖지 못하고 '나'의 관심과 호기심의 영역 안에서 그저 이국적인 감정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계 미국인 어머니를 두고, 서양인의 용모에 부산 사투리를 편하게 쓰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무게나 고뇌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소설은 그저 그것을 단순한 에피소드나 흥밋거리로, 그도 아니라면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간헐적으로 보내는 엽서를 통해 수동적이거나 사후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리투아니아 여인>은 주인공의 이야기이면서도 '나'의 호기심이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요약적으로 전달되는 기묘한 방식이 지속된다.

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작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피와 땅에 바탕하는 정체성의 무의미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리투아니아 여인>은 그것을 분명히 초과 달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피와 땅에 바탕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때 아닌 민족주의의 망령에 홀려 있는 얼치기 네티즌들"(264쪽)로 인해 벌어진 촌극이지, 심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고민 역시 '나'의 "피곤하면 모임 뒤에 이리로(혼자 사는 '나'의 아파트-인용자) 와. 내가 이해하는 그런 피곤이라면 여기 와서 쉬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245쪽)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위로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아파트) 안에서 아예 무화되어버리고 만다. 그때 결국 '혜련'이라는 이름과 동시에 '헬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구체적 인물의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온 개인적 삶 역시 보편적 '여성'이라는 틀 안에서 소멸되고 만다.

다시 한 번 지적하자면 이것은 그저 단순한 소설 구성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의 지적처럼 이문열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징이자 한계라는 점이다. 이제 <리투아니아 여인>은 스스로 애써 담고 있던 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연극'과 '뮤지컬' 안의 예술적 논리 속으로 등 떠밀어 버리고 만다.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그대로 인용한다면 이는 "예술의 보편성 또는 노마드적 성격에 대한 짧은 성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가 운영하는 극단이나, 처음 연출한 뮤지컬에서는 성공을 거두지만, '연극적'으로 느껴지던 '나'의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소설 외적으로 보았을 때 작품의 틀을 유지시켜 나가는 데 아무 문제없는 '이문열적 시선'이 결혼 생활 같은 구체적인 삶의 장면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삶' 그 자체를 마치 '연극'과 같이 현실이 소거된 인위적 구성으로 만들어 결국 소설 내적으로 파국을 부르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주책없이 떨리는 목소리"(267쪽)로 함께 있어주기 원한 '나'를 벗어나는 '혜련'이라는 인물 자체는 <리투아니아 여인>이 거둔 유일한 성공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주책없이 '혜련'을 그저 "상간의 추억을 가진 근친"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말이다. 결국 <리투아니아 여인>이 보여주는 실패와 성공은 그간 이문열 소설이 보여준 그것을 정확히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문열이 자신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한,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 어떤 영웅들보다도 앞서나가 우리의 현실을 바꾸는 '얼치기 네티즌들'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의 성공과 실패는 끝없이 반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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