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넘게 해온 일이지만, 매해 바뀌는 규정과 지침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고지서라도 나갈라치면 10여 초에 한 번씩 울리는 전화 민원에 골머리를 썩는다. 그 와중에 전화 점검이라도 있으면 시쳇말로 '확 돌아버린다.' 경기도에서 일어난 전화 사건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속, 정확, 친절은 기본이고 과잉 친절이 미덕이 된 지 오래다.
법정 업무가 뭐가 힘드냐며 업신여기는 동료도 있지만, 10년간 우리 부서에서만 이런 저런 이유로 젊은 직원 3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은 내가 속한 비상근무조의 누구이고, 눈이 오면 눈싸움이 아닌 '긴 삽 옆에 차고' 눈과의 싸움에 대비해야 한다. 그 곳에 민원에 찌든 감정 노동자는 있지만 보람찬 국민 봉사자는 없다.
대학 시절, 나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제 멋에 취해 살던 때가 있었다. 그 자유로움의 유통기한은 4년이었고, (5년 만에 졸업했지만, 1년은 자유롭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나는 부패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원서를 넣어 보았지만, 나는 학점, 외국어, 전공 지식 모든 면에서 미달이었다.
우리나라에 나 같은 불량품을 받아줄 회사 따윈 없다는 걸 직감했다. 공무원 시험은 이런 나에게 기회였다. 1년 정도만 공부하면 공직은 누구에게나 현실이 되던 시절이었다. 운 좋게 들어와 이제 먹고 살만하면서 무슨 넋두리냐며 타박할지 모르겠다. 국민의 머슴이라는 피해의식과 다소 불안해진 노후 탓일까. 여기에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도 한 몫 했으리라.
신의 직장, 철밥통 그리고 비리의 온상이라는 이미지는 국민 모두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예고 없는 해고 통지가 민간 기업에선 다반사. 그래서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공무원은 철밥통 맞다. 연금도 그렇다. 법령 개정이 되었음에도 아직 국민 연금과 공무원 연금의 보수 차이는 확연하다. (사실, 국민연금을 연금이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고위 공무원의 비리는 말해 무엇 할까. 그러나 소방·경찰 공무원은 매순간 순직을 감수해야하고, 집 한 채 사놓고 은행 이자에 허덕이며, 자녀 교육에 허리 휘는 하급 공무원은 내 주변에 수두룩하다. 권력에 가깝지도 않으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과 질시를 받는 무리, 우리 하위직 공무원의 현주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조선 시대에도 "양반과 백성 사이에서 천시 당하"던 공무원들이 있었다 한다.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책을 만났으니, 김인호의 <조선의 9급 관원들>(너머북스 펴냄)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료 수집 등 책을 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토로한다.
"어느 사회든 사람들의 관심은 위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신분이 낮거나 평범한 서민에 대한 관심은 적다. (…) 역사가는 기록으로 말한다. 보통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여기저기 흩어져 산만할 뿐 아니라 높은 사람이 생각하는 '통치'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었기에, 이를 모아 그들의 삶을 추적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조선의 9급 관원들>(김인호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그래서 "흩어져 산만한" 자료를 찾아내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한 이 책 <조선의 9급 관원들>은 김인호라는 역사가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들춰낸 기록이라 볼 수 있겠다. 그가 찾아낸 역사는 바로 책 제목대로 하찮았던 조선 시대 9급 관원의 이야기다. 이런 사람들이다.
조선 시대 하급 관원 중엔 길을 인도하고 심부름을 하던 '구사(丘史)'라는 직책이 있었다. 나라에 소속된 남자종이었는데 종친, 공신, 고위 관리에게 나눠주고, 길 인도와 심부름, 잡일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 다양한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세종대의 일이다. 왕실 종친 근녕군 이농과 의성군 이용이 지금의 한양대학교 근처인 살곶이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하다 걸렸다. 개인 사냥을 금하고 있었으니 처벌이 불가피했다. 세종은 의금부에 명령하여 그들(종친)의 구사에게 채찍 40대를 때리도록 했다."
어려운 노역에다 대신 처벌까지 받으니 그 생활의 비천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땅은 예로부터 공개념이 강했던 터라 그 크기와 수확량을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 땅에 대한 측량에 동원된 사람 중 하나로 '산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이도 있었다. 산원은 땅 측량 등 실무를 맡아 보면서 백성들을 착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음 글을 보면, 하급 관리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인조대 왕실 종친인 경평군 이륵은 집을 새로 짓고 호조에 건축 비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비용을 받지 못하자 집값으로 수백 냥의 은덩어리를 호조의 서리와 산원들에게 징수했다."
잡일을 다 맡아 하면서, 매까지 대신 맞아야 했던 '구사'나 지위를 이용해 백성을 착복할 수 있었으나, 권력 앞에 숨죽였던 '산원'이나 오직 살기위해 비루함을 참아야 했을 터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책(<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을 읽다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삶의 과잉이며 기꺼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각이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삶의 과잉'은 자유, 명예, 존엄성, 자율성 등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살기 위해 먹고 산다면,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조선의 하급 관원들은 정말이지 하찮기만 한 존재였을까? 그들에게 "삶의 과잉"이란 것이 있긴 했을까? 국왕의 앞길을 인도하던 하급 관원 중금(中禁) 이야기를 통해 실마리를 찾았다.
"도승지 등은 중금 노형손과 장효순이 벌인 일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장효순은 노형손보다 나이가 좀 적었고, 꽃미남이기도 했다. 그래봐야 두 사람은 10대였고, 평소에 단짝이었다. (…)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가까운 것은 단지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이 잠을 자면서 이상한 짓도 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가치 논쟁은 제쳐 놓고, 조선 시대에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건, 어떤 존엄한 가치를 짐작케 한다. 그들은 자기 욕망의 주체로 살았던 것이다.
광대는 또 어떤가. 인간은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고 나면 볼거리를 찾는 법이다. 조선 시대에 공연은 대표적인 볼거리였고, 광대는 공연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궁궐에서의 공연은 주로 민간에서 일어난 일을 주제로 하였는데, 광대들의 공연으로 당시 관청의 횡포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공연은 생계 유지를 위한 것임에도 풍자와 해학을 통해 임금과 좌중을 깨우치는 놀라운 일을 벌인다.
"관청이 무당에게 세금으로 포를 너무 많이 거둬들이던 때가 있었다. 관리들이 세금을 받으러 오면 무당집은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면서 기한을 연기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당연히 무당들은 너무 괴로워했다. 광대들은 이 내용을 대궐에서 공연했다. 이를 본 세조가 무당의 괴로움을 알고 세금으로 내는 포를 면제해주었다."
존엄은 인간의 천부적 권리지만, 권력과 제도에 맞서는 희생과 투쟁을 통해 성취해왔다. 천대 받았던 그들이, 성리학적 가치관 아래에서 동성애를 표현하고, 생계 위협 속에서도 세태를 풍자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한 것은 생물학적 삶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생이 짧지만 강렬한 기회라면, 삶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사실 개인 생활에 허덕이며 사는 하찮은 존재와 자신의 일생을 건 존엄한 삶은 다르지 않다. 하찮았던 개인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한발 더 다가섰을 때 존엄한 그들이 되었으므로. 그래서 하찮은 존재는 자각을 통해 존엄해진다. 동성도 사랑할 수 있고, 어려움에 처한 무당이 우리와 하나라는 깨달음. 나도 전화 받는 기계 이전에 감성을 가진 한 인간이며, 국민의 봉사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 말이다. 자각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온기에서 나온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입관식 때였다. 아버지 이마에 손을 얹었더니,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서 서늘했다. 내 온기는 아버지께 전해졌을까. 삶과 죽음의 차이는 온도차였다. 발인이 토요일 새벽이었음에도 직장 동료들이 운구에 화장장까지 함께해주었다. 우리 속에 각인된 공감의 유전자는 온기를 만들어내는 샘물 아닐까. 바람찬 새벽에 가슴 한 구석은 따뜻했다.
나는 대한민국 하급 공무원이다. 처음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이제라도 온기 있는 삶의 주체로 살자. 하찮으나 존엄한 그 길 위에 서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