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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 예수, 언제부터 '좌편향'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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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 예수, 언제부터 '좌편향' 했나

[프레시안 books] 제임스 홀의 <왼쪽-오른쪽의 서양 미술사>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런 걸로도 미술사를 쓸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과 악, 문명과 자연, 남과 여 등의 서구 이분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좌, 우의 구분도 있다는 걸 알 테고, 오늘날에도 일상적으로 좌파/우파라는 단어를 쓰면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마당에 상징이 중요했던 과거에 그것이 더더욱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정들 다 미루면서까지 책을 덥석 집어 든 것은 제목에 낚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후회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책은 상당히 전문적이었고, 주석을 제외하고서도 무려 600쪽에 가까운 부담스런 분량이었으나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오랜만에 깊이 있게 도상학적으로 분석한 책을 읽었다는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서구 문화에서 뿌리 깊은 구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왼쪽-오른쪽의 구분이다. 책에서 저자는 이 구분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오리족부터 그리스도교까지 거의 모든 문화에 존재한다고 쓴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오른손잡이를 '정상'으로 놓고 왼손잡이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며 왼손 쓰기를 극구 말렸다. 언어 습관을 보더라도 오른손을 '바른손'이라 부르니 자연히 왼손은 '바르지 않은' 손이 된다.

그것을 놓고 보면 좌/우 구분과 불균형의 문화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화와 시대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오른쪽은 정신과 영혼을 향하고 왼쪽은 세속과 물질적인 것을 향해 있었음을 다양하게 증명한다. 삶과 선함, 도덕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오른편에, 사악하고 부도덕하며 세속적인 것은 왼편에. 이런 분류가 온갖 문서를 통해 정당화되고 퍼져나갔음을 이 책은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이 성서다.

▲ <왼쪽-오른쪽의 서양 미술사>(제임스 홀 지음, 김영선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몇 가지 예만 들어 보자. 다윗은 신에게 (정신적인) 오른쪽 몸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몸 왼쪽은 거부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의 오른편에는 선한 도둑이, 왼편에는 악한 강도가 매달려 있었고 성모 마리아와 요셉은 전통적으로 예수의 오른편에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문화의 측면을 살피자면, 심지어 왼쪽에 있는 것은 점이나 사마귀나 흉터도 더 불길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왜 거의 모든 초상화에서 빛이 오른쪽에서부터 들어오고 유독 오른쪽 눈과 얼굴에 조명이 가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들은 오른쪽에 집중 조명을 받아 더욱 크고 강렬하게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은 세속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원한 것을 향해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왼쪽에 조명을 받아 얼굴의 왼쪽을 밝게 묘사한 초상화도 있는데, 그 경우는 징수원 등 뭔가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그릴 때 쓰던 방식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여기서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몇몇 자화상도 언급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혼란스러울 수가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다른 초상화에서 왼쪽 오른쪽은 자화상에서는 반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래서 느닷없이 푸생은 오른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왼손잡이로 그린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저자가 이 부분을 해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화상에서 거울 이미지를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중반이라고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 이미지를 뒤집어서 그렸으므로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좌/우 방향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전의 화가들이 거울 이미지를 수정해서 그렸다는 주장은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고 미술사학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한 의문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들이 많이 나온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로 하여금 산초 판자에게 "읽는 법을 모르는 인간 또는 왼손잡이인 인간은 그가 아주 비천하고 하찮은 부모한테서 났거나 그 자신이 아주 비뚤어지고 삐딱해서 신이 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다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라고 했다거나 에스파냐의 작가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1580-1645)는 <지옥의 꿈>이라는 책에서 지옥에는 특히 왼손잡이들을 위해 예약된 자리가 있다고 했다는 것 등은 책에 수록된 풍부한 일화들 가운데 극히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이 책이 어찌되었든 '서양 미술사'이기 때문에 미술 작품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저자가 특별히 무게를 가지고 서술한 화가는 미켈란젤로다. 미켈란젤로가 1530년대에 왼쪽-오른쪽 구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연구했으며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였던 그가 참회의 시를 쓰면서까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썼다는 것, 그가 환히 드러난 오른쪽 눈과 가려진 왼쪽 눈을 묘사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는 것 등은 어디선가 읽었을지라도 딱히 주목하지 않은 탓에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큰 이야기다.

▲ 미켈란젤로, <세 개의 십자가>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는 그의 오른쪽 얼굴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며 등장하고 천국으로 오르는 선한 영혼들은 예수의 오른편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은 그의 왼편에 자리 잡는 것이야 전통적인 도상에 속하는 것이니 특별할 게 없지만, 그 그림에서 흉악한 악마에 의해 붙들린 공포에 질린 남자가 자신의 왼손으로 왼쪽 얼굴을 가리고 뒤늦은 참회를 하는 장면은 저자가 특별히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보고 넘어갔을 것이다. 또한 미켈란젤로가 <세 개의 십자가> 소묘에서 그리스도의 머리가 자신의 왼쪽에 있는 죄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저자는 그것이 단순히 실수이거나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소묘로 이미지를 뒤집어 제작하는 실험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히 전통적인 체계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해석한다. 그 후 17세기에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왼쪽으로부터 묘사되는 일은 아주 흔해졌고, 그래서 옆구리의 상처를 왼쪽에 표현하는 것을 좀 더 쉽게 용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의 저주받은 '왼쪽'이 '영원한 지혜'가 있는 심장이 있는 곳으로, 영광의 휘장으로, 죄 많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시금 주목 받게 된 시기는 15세기라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왼쪽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한 저술들은 간혹 있었지만 그 효과가 오래가지는 못했고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왼손 또는 왼쪽의 신화화가 절정에 이른다. 문헌이 아니라 미술 작품으로 보면, 그리스도가 자신의 왼쪽 몸을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16세기 들어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면 포르데노네, 파올로 베로네세, 티치아노, 틴토레토, 루벤스, 야코브 요르단스, 푸생, 벨리니 등의 작품들에서도 이 '왼쪽' 모티브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왼쪽은 전통적으로 애정이나 사랑의 표현에서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왼쪽이 육체적 욕망과 욕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서약하는 반지는 심장과 가까운 왼쪽 손가락에 끼도록 되어있으며, 비록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의 오른편에 앉도록 좌석이 배치되었으나 사랑의 제스처에서는 왼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왼쪽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저자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는데, 베르니니의 조각 <성 테레사의 법열>에서 성녀께서 자신의 왼쪽을 관람객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천박하고 야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과 직접 연관된 심장이 있는 왼쪽에 대한 인정은 곧바로 낭만주의 미학으로 연결되었다. 진정한 예술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감정은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에서의 좌편향이 두드러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현대에 오면 세련됨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오히려 서투름에서 오는 감동을 추구한다. 20세기 초반의 미술에서 아이와 같은 순진한 눈, 원시적인 호기심을 통해 새로운 자아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제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고 그들에 의해 우리는 좌/우의 균형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개념화된 '왼쪽'의 해방, 그리고 더 나아가 양쪽의 균형화를 위해 사이 톰블리, 디터 로스, 알리기에로 에 보에티 같은 현대 예술가들은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고 저자는 그 기준에 의해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해석한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이는 현대 미술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못지않게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개념적인 현대 미술의 중요한 경향들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부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도 좌/우의 기준을 놓고 미술 작품을 본 적이 없으므로 저자가 펼쳐놓는 서양 미술사가 흥미롭게 다가오고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문헌들과 중세 기사들의 편지,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 역사서와 주석, 해설서, 인터뷰 등을 방대하게 인용하고 있어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이 구분법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그림의 세부적인 모든 것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화가가 그림을 구성할 때 특히 르네상스와 같은 고전적인 그림에서 형식적인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어떤 방식으로 보고자 마음먹은 상태에서는 온갖 것들이 서로 연관성을 맺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한 번 상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전혀 관련 없는 맥락에서 한 사소한 행동이나 말실수도 의심의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원전이 될 법한 텍스트와 그림을 상상력을 통해 연결시키거나 화가가 그것을 알았을 것이라거나 읽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통해 정당성을 설명한다. 이것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때때로 너무 지나쳐서 글의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게다가 현대 미술로 넘어와서 피카소의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에 오면 이 글을 읽는 것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 가장 추상적인 화면에서까지 어떤 형태를 굳이 찾아 그것이 화가의 왼쪽 선호도나 악마주의와 연결시키거나 어떤 특정한 주제, 예를 들면 작품에서 미소 짓는 왼손잡이 음악가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1911년에 있었던 루브르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거나 하는 것은 이 책의 저자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도상학적으로는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주장이다.

또 한 가지 독서를 방해하는 점을 들자면 그림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림의 세부 묘사가 매우 중요한 도상학적 글에 그림이 없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인터넷을 켜놓고 그림을 계속 검색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게다가 책에 수록된 그림도 전부 흑백에다 크기도 작아서 글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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