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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찌질男, 백인女에 집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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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찌질男, 백인女에 집착한 이유는?

[프레시안 books]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완벽하지 않아>

미국 만화계의 젊은 거장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에이드리언 토미네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바로 그의 대표작인 <완벽하지 않아(Shortcomings)>(이용재 옮김, 세미콜론 펴냄).

열여섯 살 때부터 <시신경(Optic Nerve)>이라는 독립 만화를 만들기 시작한 토미네는 4년 후, 만화 출판으로 유명한 드론 앤 쿼털리에서 정식으로 <시신경>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 하비 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서머 블론드>, <슬립워크>, <결점들>, <결혼식을 앞둔 장면들> 등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나갔고, <뉴요커>나 <롤링스톤>과 같은 유명 잡지에 삽화를 수록하고 있으며, '일스(Eels)', '요 라 탱고(Yo La Tengo)' 등을 비롯한 뮤지션의 음반에 삽화를 싣고 라이너 노트를 쓰기도 했다.

토미네는 대학 교육까지 이수하며 그럴듯한 미국인 중산층으로 살았지만, 아마도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인종적 특성으로 인해 마블과 DC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 만화보다 대니얼 클로즈의 <고스트 월드>(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라커룸 앞에서 근육질 백인 남자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동양인 꼬마가, 방과 후 방에 틀어박혀 당대를 풍미하던 그런지 음악을 들으며 만화를 그리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자연스럽게 그는 로버트 크럼이나 아트 스피글먼과 같은 1세대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한 2세대 대니얼 클로즈의 뒤를 잇게 되었다. 즉, 1990년대 이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의 '대안'으로 발전한 '인디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라면 '그런지 록', 영화라면 '미라맥스의 선댄스 풍 독립 영화' 같은 문화적 줄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완벽하지 않아>(에이드리언 토미네 지음, 이용재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완벽하지 않아>는 주인공 다나카 벤의 성장담이다. 모든 성장담이 그렇듯이, 이 만화 역시 한계가 뻔히 보이는 주인공에게 능력 밖의 임무를 부여하고 그것을 넘어서라고 강요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벤은 불가피하게 계속되는 구렁텅이를 마주치게 되고, 가까스로 위기를 넘겨가며 자신이 가진 문제와 한계의 본질적인 해결책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좌충우돌의 에피소드와 독자 사이에 교묘한 거리를 둠으로써 블랙코미디의 잔인한 매력을 담아냈다. 그러니 이 만화의 서사는 거의 교과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전통 극 형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닉 혼비나 조나단 레섬을 비롯한 유명 소설가와 각종 매체가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향 때문이다.

일단 첫 장면부터 드러나는 벤의 콤플렉스는 마치 상업 영화 첫 5분의 설정과 절묘하게 닮아있다. 앞으로 다뤄질 내용이 어떤 것인지 뻔히 짐작하게 해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첫 장면'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고 있다. "별것도 아닌 영화를 아시아계가 만들었다는 거 하나로 띄워준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벤의 모습은 자신에게 부여된 인종적 뿌리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이 비정상적인 콤플렉스가 바로 이 서사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 아마도 영화감독을 꿈꿨던 것 같지만, 현실은 너드(nerd) 같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루한 일을 하고 있는 동네 극장 매니저 다나카 벤. 그가 어떻게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지, 그의 문제는 무엇인지, 이 만화는 거침없이 벤의 치부를 묘사하기 시작할 준비를 한다.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와 2부에서 벤은 두 명의 백인 여성을 만난다. 여기서 벤은 오직 백인과의 섹스를 통해서만 자신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즉, 동양인은 백인보다 성기가 작다는 상식적 콤플렉스는 벤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백인 여성을 갈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가 백인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백인이 특별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백인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 서기 위함일 뿐. 그것은 하나의 수컷으로서 미국의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돼 투명 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양인 이성애자 남성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을 법한 열등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오줌 사진'을 모으는 자칭 아티스트인 백인 소녀와의 우스꽝스러운 만남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두 사랑할 수 있다"는 보편적 사랑관을 과시하며 남들에게 민폐나 끼치고 다니는 펜스 시터(Fence Sitter), 즉 양성애자 여성과의 만남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정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백인 여성이 접근하는 일은 없고, 그의 근본적인 콤플렉스는 점점 더 깊어질 뿐이다.

벤의 오래된 연인으로 등장하는 하야시 미코는 벤의 문제를 잘 알고 그를 동정하기도 하지만, 벤을 위해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밤마다 백인이 나오는 포르노를 보며 판타지에 젖어 시간을 때우고, 자신에게는 늘 불평만 늘어놓는 남자 친구를 떠나 뉴욕에서 생활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벤의 콤플렉스는 더욱 구체화된다. 동양인 이성애자 '여성'들은 서양인 남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아닌 사실은, 동양인 이성애자 '남성'인 벤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의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욕은 '만 지역(Bay Area)'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항상 입에 올리는 곳이 아닌가. 범죄율이 어떻고 정신없는 분위기가 어떻다며 깔아 내리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번쯤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애증의 뉴욕 말이다.

그를 옆에서 도와주는 세심한 조력자로 설정된 캐릭터, 앨리스 킴은 인천에서 온 한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는 한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한인 교포로, 그녀를 통해 이 만화는 미국 사회에서 한인 교포가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슨 일이든 하면서 돈을 그러모으는 생활력,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억척스러운 교육열, 영어에 서투르고 문화에 낯설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한인 커뮤니티 등.

그러나 킴은 그런 부모 아래에서 자랐을지언정 결코 부모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존재다. 바로 레즈비언, '좋은 데' 시집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녀의 처지는 이 블랙 코미디에서 가장 안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고민과 불안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을 뿐이다. 분명 엄청나게 보수적일 것이 빤한 부모님과의 갈등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킴은 가엾은 벤의 둘도 없는 친구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화를 조절하지 못할 때마다 킴은 계속해서 그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넨다. 킴은 벤에게 자신의 생활 자체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사랑 받기 위해 사랑 하는 것'의 부질없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킴의 에너지는 극의 후반, 그녀의 애인인 메레디스를 통해 확대된다.

뉴욕 대학의 젊은 교수로서 일찍이 '어른'이 된 메레디스는 벤을 앉혀 두고 날카롭지만 다정한 조언을 계속한다. 킴의 말대로 이미 벤이 '알고는 있지만 조절하지 못했던' 어떤 것에 대해. 이는 <스타워즈>에서 오비완 케노비가 어린 루크 스카이워커를 요다에게 인도하는 것 같은, 전통적인 매력이 있는 상황 설정이다.

배경을 달리하며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은 이 만화가 사용하는 효과적인 전통적 서사 방식이다. 이 작품은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동쪽과 서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들은 북 캘리포니아 출신이며, 주인공들의 갈등이 증폭되어 천장을 쳤다가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사건은 뉴욕에서 벌어진다.

뉴욕과 북 캘리포니아는 미국 대륙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중산층 정서를 대변하는 곳이다. 버클리와 오클랜드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만 지역'은 전통적인 히피의 고장이다. 오래 전부터 미국 땅의 게이들은 게이 증오 범죄를 피해 평화롭고 살기 좋은 이곳 북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고, 남 캘리포니아의 파티 정서와는 상이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 '다문화'를 꽃 피우며 살았다.

반면 뉴욕을 위시한 동부는 가장 오래된 미국으로, 미국적 가치를 원형 그대로 꾸준히 지켜오며 20세기 세계의 눈부신 발전을 견인한 곳이다. 그러나 그 문화적 깊이만큼 항상 불만의 대상이 되는, '정신없이 살아도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는 생활 구조'로 악명이 높다.

이 만화에서 주요 인물, 즉 세 동양인은 모두 고향을 떠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을까? 뉴욕에서는 그들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을까? 혹시 그 젊은 청춘들은 고향에서 살면서 고향의 안위에 젖어 정작 자신들의 문제를 꾸준히 내면화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고향의 안위를 벗어나 뉴욕이라는 벌거벗은 생존의 도시에 안착하자마자 자신들의 자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미코는 서로의 목을 조르던 연애로부터 해방된다. 남자 친구와 함께였다면 상상지도 못했을 모델이라는 새 직업도 얻는다. 새 남자 친구로부터 달콤한 사랑의 말도 듣게 된다. 그저 끊임없이 섹스나 하면서 살겠다던 킴 역시 다이크(dyke)로서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자 관심도 없던 대학원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향한다. 그리고 결국 메레디스라는 사랑을 만난다. 그러면 우리의 가엾은 벤은?

이 만화는 인종 정체성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인종 정체성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남기지 않는다. 이 선택은 옳았다. 이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오히려 인종 정체성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생겨난 콤플렉스가 특수하다면 그것의 치유를 위해 제시되는 해결책 역시 특수한, 그러니까 피부색이 달라서 받을 수밖에 없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벤에게 보내는 처방전은 콤플렉스를 넘어서라는 주문이 아니라, 그것을 소멸시키라는 쪽으로 향한다. 즉, 인종이든 뭐든 콤플렉스라는 가시로 주변 사람들을 찌르며 점점 외로움에 사무치게 될 운명의 주인공에게, 더 강한 가시를 만들라는 주문은 필요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을 유난히 신경 쓰는 시절을 누구나 지난다. 이 만화는 그 철없었던 시절을 명랑하고 담담한 그림체에 빠르고 시니컬한 대사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적지 않은 인물이 적재적소에서 나타나 벤을 괴롭히고, 각 인물 간의 에피소드도 정밀한 계산속에서 리드미컬하게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이드웨이>에서 처갓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바라보는 폴 지아메티의 멋쩍은 미소를 연상시킨다. 단 네 컷의 그림 속에 주인공 벤의 철없었던 과거가 모두 들어있다. 마지막 장면의 쓸쓸함에는 아마도 유년기가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쯤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쉬움의 눈물이 후회와 좌절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작가가 얼마나 자신의 주인공인 벤에게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는지 증명한다. 희대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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