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와 그의 아이들이 지하철을 탔다.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고 제멋대로 굴자 분위기가 금세 바뀌었다. 내 옆에 앉은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 보통 심란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짜증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보시오, 당신 아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잖소. 근데 당신은 어떻게 애들을 조금도 말리지 않는 겁니까?" 남자는 고개를 들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 그렇군요. 어떻게든 손을 써야겠네요. 우리는 방금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애들 엄마가 한 시간 전에 눈을 감았답니다. 전 지금 머릿속이 멍한데, 보아하니 사람들도 어떻게 손써야할 지 모르고 있군요."
나는 갑자기 상황이 달리 보였고 상황이 달리 보이자 생각이 바뀌면서 감정과 행동도 변했다. 짜증이 사라졌다. (…)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와 정치학자 케니스 샤프가 공동으로 집필한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김선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사내의 말만 듣고 어떻게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던 걸까. 스티븐 코비가 경험한 일이라고는 장난치는 아이들과 아내를 잃은 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건 이야기의 힘이었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있으며,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배리 슈워츠·케니스 샤프 지음, 김선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이렇게 제도에 회의를 느끼는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이 제시되었다. 잘못하면 벌을 주는 규율과 성과를 통해 보상해주는 인센티브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이다. 그러나 이는 도덕 감정,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현명한 직장인들 앞을 막아선다.
뉴욕대학교 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제롬 로웬스타인이 목격한 현상은 이러했다.
임상 실습 때 늘 겪는 시간 압박과 수면 부족으로 의대생들은 '극도로 피곤하고 때로 감정 이입이 힘들다'며, (…) 연구에 참가한 한 의대생은 말했다. "나는 환자와 어떤 관계를 맺는 일보다 어떻게 하면 진찰을 신속히 끝낼까 하는 고민을 더 많이 한다. 그런데도 난 늘 내가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도 민원인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보다는, 상담을 '어떻게 하면 신속히 끝낼 수 있을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 그건 처리해야할 다른 업무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자칫 불친절한 말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규율 때문에, 선의는 짓밟히고, 관계는 사라진다.
다음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초등학교 4학년생들에게 인센티브를 걸고 시행했다던 독서 교육 내용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1점씩 주는 방법이었다. 독서 점수가 어느 정도 쌓이면 아이들은 상을 받았다. 점수가 가장 높은 학생은 1등상을 받았다. 이 방식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아이들이 신들린 듯 책을 읽었다. 어떤 동료의 딸이 바로 이 학급의 학생이었다. (…) 본래 책 욕심이 강했던 그의 딸은 이제 두 가지 기준으로 책을 골라 든다고 했다. 하나는 분량이 적은 책, 다른 하나는 활자가 큰 책이었다. 그리고 딸아이는 책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아이에게 독서란 오직 책 한 권을 끝내고 다른 책을 집는 일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일의 목표나 목적을 가리켜 '텔로스(telos)'라고 했다. 목적을 벗어나는 행동은 가치 있는 삶과 멀어진다는 것. 이 시각으로 보면, 펜실베이니아 초등학교 교육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독서 교육의 텔로스는 책 읽는 즐거움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경쟁의 화신이 되어 종내 죽음에 이르는 아이들을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할까? 인센티브는 보상을 안겨주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놓치기 일쑤다. 규율과 인센티브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규율과 인센티브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덕적 기술과 의지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규율이 도덕적 기술을 없애고 인센티브가 의지를 꺾는다는 점이다.
과연 그렇다. 그 어떤 조직의 개인이라도 도덕적 의지이자 목적인 '텔로스'를 각인하고 현실에 적용할 일이다. 하지만, 세상사 의지만으로는 고단한 법. 맞춤형 기술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김재홍·강상진·이창우 옮김, 길 펴냄)에서 해결책 찾는다. 바로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기술에서 특히 중요한 두 가지 능력을 강조했다. 바로 선택지를 숙고하는 능력과 특정 상황에서 도덕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충분한 숙고와 분별력이야말로 실천적 지혜의 핵심이었다.
고전의 지혜는 시공을 초월하지만, 실천적 지혜라니, 말이 쉽다. 수면 부족과 시간에 쫓기는 뉴욕 대학 의대생과 인센티브 때문에 독서 교육을 외면한 초등학교 교사들, 그리고 민원에 찌든 공무원에게 텔로스를 인식하고 실천적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하라는 건 아무래도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인센티브의 유혹을 뒤로하고, 잘못된 규율이라고 이를 어겨가면서까지 실천적 지혜를 발휘해야 옳은 일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 판사 로이스 포러의 이야기는 그 뜻이 사뭇 깊다.
마이클(피고)은 총기를 휘두르며 택시 기사를 위협해 50달러를 갈취했다. 이런 경우 판결 지침에서 정한 최소 형량은 24개월이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초범이었고, 그가 휘두른 무기는 장난감 총이었다. 담당 판사였던 로이스 포러는 말한다.
마이클은 학교를 중퇴하고 임신한 여자 친구와 결혼하긴 했지만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장에 준하는 학위 증서를 취득했으며, 직업도 꾸준히 있었고 딸을 교구 학교에 보낼 만큼 돈도 벌었습니다. 이는 마이클과 아내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했다는 뜻이지요. 총기로 택시 기사를 협박하기 직전 마이클은 직업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 실의에 빠진 마이클은 토요일 밤에 외출해 술을 적잖이 마신 다음 택시를 털었습니다.
24개월의 형량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포러는 판결 지침을 벗어난 징역 11개월 15일로 판결을 내렸다. 또 가족 부양이 가능하도록 감옥 밖에서 일을 하도록 허용했다. 2년 후 마이클은 형기를 마쳤고 택시 기사에게 돈도 갚았다. 그러나 포러 판결에 불복한 검찰은 포러가 마이클에게 최소 5년을 구형해야 했다며 대법원에 항소했다. 법원은 포러에게 마이클에게 징역 5년으로 다시 구형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의 명령과 양심의 갈림길에서 포러는 16년간 몸담아왔던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충분한 숙고와 분별력으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한 포러는 판사 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포러는 법관의 양심과 정의라는 법원의 텔로스를 인식하고 있었고, 마이클의 삶을 "이야기"로 들어주었으며 정의에 입각해 적절하게 판단하는 것이 실천적 지혜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불합리한 규정을 어기고 "영리한 탈선자"가 되었고, 이에 따른 조직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하였다. 그는 혹 "행복은 마음가짐이 아닌 존재 방식"이라고 생각한 걸까? 법관직을 떠난 건 그의 양심이었고, 그게 행복이라 믿은 것이리라.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공무원의 텔로스는 무엇인지 차분하게 고민해본다.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다.' 전화벨이 울린다. 친절하고 깔끔하게 답변한다. 또 전화가 왔다. 통화 중에 민원인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인가 한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전화에 대고 잠시 기다려 달라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권하며 왜 오셨는지 묻는다. 이내 전화기 너머로 고성이 들려온다. 그간 공무원에게 쌓여 있던 불만을 늘어놓는다. 내 이름을 대란다. 부아가 치민다. 13년 내공의 실천적 지혜는 찾을 길이 없다. 구청 하급 공무원에게 텔로스라니. '봉사'라는 개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봤다.
"봉사(奉仕)는 국가와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일이다."
인정할 수 없다. '내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내 사전'에도 '봉사'라는 단어가 있었다.
"봉사(奉仕)는 국가와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애쓰는 일이지만, 결코 자기 존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게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대한 나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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