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우리가 알아챌 수 있는 만큼의 거리 척도 안에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느끼며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BBC 방송 프로그램 속의 광활한 우주는 그 광활함만큼의 현실적 괴리감을 가슴이 허하도록 안겨준다. 일상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거리 척도를 미니어처 세계처럼 보여주지만, 사실 우리들에게 우주는 알 수 없는, 광활한 막연함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약간의 수식(數式)이라도 나올라치면 대부분의 손가락은 리모컨을 사정없이 두들겨대고 시청률은 수직으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우주의 막연한 규모에 지친 우리는, 그보다는 7만 광년 떨어진 행성 연방(UFP) 최강의 적인 '보그'가 살고 있는 델타 사분면으로 떨어진 USS-Voy 호가 73년 걸리는 거리를 7년 만에 돌아오는 <스타 트렉> 에피소드에 더 흥미를 느끼고, 보그 잔당인 '구체 634'와의 전투에서 파괴되는 USS-Voy 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만약 당신이 이 순간 물리학적으로 불합리해 보이는 몇 가지 사실들을 언급하기 위해 입이라도 벙긋한다면 일제히 쏟아지는 매서운 눈초리를 견뎌야만 할 것이다. 그저 곧추세워진 당신의 검지만 홀연할 뿐이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우주로 나아가는 길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상 속의 여행인 것이다.
▲ <우주 사용 설명서>(데이비드 골드버그·제프 블룸퀴스트 지음, 이지윤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휴먼사이언스 |
이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두 사람은 물리학계의 초미의 관심사인 상대성 이론, 표준 모형, 양자 역학, 시간 여행,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 팽창 우주, 빅뱅, 암흑 물질 등의 묵직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던져대며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들은 <우주 사용 설명서>를 펼쳐들며 우주로 한번 나아가 보라고 우리에게 격하게 추천한다.
"대중 서적들 덕분에 특정 과학 주제들이 대중들의 의식 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지금 이 순간에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어서 물어봐라. 우린 기다릴 테니. 이제 다시 그 사람을 붙잡고 정확히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라. 이번엔 쉽게 답하지 못할 게 뻔하다."
너무나 자주 듣고 말하느라 '우주'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주제이지만, 결국엔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고려 말기 무신 정권 시대 권력자들의 이름과 다를 바가 없다.
"먼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말해보자. <시민 케인>에서 찰스와 에밀리가 아침 식탁에 앉아 있는 장면을 보자. 해가 바뀔수록 그 식탁이 늘어나 케인과 아내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걸 기억하는가?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의 식탁은 팽창하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도 팽창하지 않는다. (가로지르면 그 거리가 수천만 광년인) 은하도 우주 전체의 팽창에 참여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국지적'이다. (…) 약 3000만 광년 정도 바깥쪽을 내다본다면 실제로 모든 은하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빨리 멀어져 가는 듯하다는 거다."
팽창하는 우주는 은하들이 얼마나 빨리 서로에게서 멀어지는지 궁금하게 만들고, 그 멀어지는 우주의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으며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다면 어떻게 분포하는 것일지 알고 싶게 만든다. 서로 멀어지는 우주에 중심이란 게 있을까. 점점 멀어지는 우주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의 형상은 어떤 것일까. 우주는 어떻게 변화할까. 팽창을 계속할까. 우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빈 공간은 정말 빈 공간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달린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 속 실제 은하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존 휠러가 말한 것처럼 '우주는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이라고 지시하고, 물질은 우주에게 어떻게 휘어지라고 지시한다.'"
팽창하는 우주, 외계 생명체, 빅뱅 등 우주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해학적으로 풀어 헤치던 작가들은 '미래'라는 난제에 봉착한다. 전하도 없고 빛과 상호 작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감지되지 않는 '암흑 물질'이 우리 우주의 미래일까. 다 맞추었다고 생각한 퍼즐의 또 다른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답을 기다리는 새로운 문제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우주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것인가.
'고독한' 이 두 물리학자는 고리타분할 만큼 지루한 물리의 매력적인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단순한 질문 설정으로부터 출발해서 일반 상식과 학문의 접점에서 노니는 두 사람의 해학은, 냉소와 시시껄렁함으로 장식되긴 했지만, 과학적 지식의 해박함을 기초로 한다. 그들은 거침없이 대중에게 다가간다. 이전의 조심스럽고 진지한 일반 물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가금씩 로코코 장식장을 보는 것처럼 너무 과한 비유와 장식으로 작가들의 본래 의도를 희석시키기도 하지만, 그들의 '공력'은 인정할 만하다. 이런 저런 프로그램의 주인공들 이름 사이에서도 또렷하게 일어서는 범상치 않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길이 탄탄한 물리의 원칙을 철저히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 타임머신과 블랙홀과 터미네이터가 손을 잡고 나타나면, 당신은 더 이상 크게 벌린 입술 사이로 당신의 목젖을 보이며 잠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두 물리학자들이 원하는 소통의 방식이다.
목청이 터지라고 열을 올리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설명해댄 이후로, 남자는 뉴욕까지 가는 1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잠만 잤다. 무지막지한 수식의 전개로 공격을 해댔으니 지칠 대로 지쳤으리라. 사실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의 감은 두 눈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시작한 지 30초 만에 커다란 목젖을 보이며 모두 잠들어버린 첫 강의와 더불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독한' 순간이었다. 그 때를 기억하며 이 두 작가들의 발칙한 시도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끝으로 몇 가지 아쉬움을 표현해야겠다. 내 작은 눈으로 하여금 무한 루프를 돌게 하는, 뜻을 알아챌 수 없게 하는 몇몇 문장들과 몇몇 전문 학술 용어도 안타까웠지만 갑자기 심하게 늙어버린 우주의 나이(251쪽)는 편집의 실수일 거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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