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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상처 입은 자들이 맞잡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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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상처 입은 자들이 맞잡은 손!

[프레시안 books] 기준영의 <와일드 펀치>

기준영의 <와일드 펀치>(창비 펴냄)는 현자와 강수의 이층집에 갈 곳 없는 태경과 미라, 우영과 그의 엄마, 그리고 우영이 돌보는 유기견 왈리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다.

소설의 1부는 동업했던 친구에게 사기당하고 결혼에 실패한 뒤 새로 만난 여자에게도 배신당한 스턴트맨 출신의 무일푼 떠돌이 태경(강수의 "아는 동생")과, 번듯해 보이는 동거남에게 맞고 살다가 3층에서 뛰어내려 도망쳐 나온 미라(현자의 "아는 동생")가 이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천석 패거리'에게 시달리는 고교 자퇴생이자 병든 엄마와 함께 거리로 나앉게 된 열아홉 살 우영이 이 집에 둥지를 틀게 되는 사연이 펼쳐진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불쌍한 타자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혈연을 뛰어넘는 '유사 가족'의 윤리적 공동체 이야기라고 쉽게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소설을 '휴먼 다큐' 스타일의 진부한 감동이나 앙상한 교훈적 담론으로 맥 빠지게 환원하는 일이다. 굳이 간추려야 한다면, 차라리 이런 식은 어떨까. 기준영의 <와일드 펀치>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뒤엉킨 애정이 서로를 엮고, 끝없이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원"하는 사람들이 서투르고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는 이야기라고.

실제로 이들의 이야기와 이들의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연민이나 선의, 책임감이나 윤리가 아니라 바로 이런 두려움과 떨림, 불안한 머뭇거림 같은 것들이다. 현자는 미라와 함께 보낸 어두웠던 어린 시절, "아무도 없을 때 서로에게 서로뿐이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내게 중요한 사람은 여전히 남편 강수와 아들 완주고, 난 그 외에 더 값진 것을 갖기에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여기, 우리 집은 고요하고 정상적이다"라고 최면을 걸면서 불안을 견디는 그녀에게 이들 모두를 받아들이는 일은 곧 "내가 저항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강수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연인 사이가 된 미라와 태경이 '당분간' 이 집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고 말할 때, 강수는 야박한 집주인 행세를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의연하게 이들을 안심시키지도 못한다. 그런 자신을 두고 강수는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대답을 생각"하는 대신에 "어디에나 있는 질문들을 생각"해본다. 그는 결국 "남은 날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거는지 귀 기울이고, 그게 어떤 지표가 되어준다면 그걸 운이고 복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 <와일드 펀치>(기준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확신도 장담도 없는 이런 머뭇거림과 조심스러움으로, 이들은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서로의 삶에 엮여 들어간다. '기꺼이'든 '억지로'든 누군가를 "감당"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동거에 우리가 서서히 공감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혈연과 제도로 묶인 가족 관계로부터 저마다 소외당하거나 상처입고 어찌어찌하여 한 데 모인 강수, 현자, 태경, 미라, 우영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런 대로 죽이 잘 맞는 다섯 남매처럼 보인다. 실은 '두 커플'이지만 남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네 사람이 낯모르던 "길 잃은 소년" 우영을 막내로 맞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들의 "기적" 같은 만남은 아름답지만 불행한 "연상의 동네 여자" 미라를 뒤쫓으며 사진을 찍어 앨범을 만드는 우영과, 막연한 예감으로 이 어설픈 인연을 가만가만 돌보고 지켜나가는 미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천석을 대신해 칼을 맞는 일)을 예감한 듯 우영은 작별 인사마냥 강수의 자동차에 앨범을 두고 내리는데, 미라는 그 불길한 암시를 놓치지 않고 강수와 태경으로 하여금 우영을 찾아 나서게 한다. 피 흘리는 우영을 업고 휘청거리며 걸어 나오는 태경에게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는 강수에게, 이 순간은 오래전 바다에서 그들이 구해내지 못했던 뼈아픈 찬이(강수의 동생이자 태경의 친구)를 되찾는 소중한 순간이 된다.

하지만 <와일드 펀치>는 그 어떤 장면도 정서적으로 과장하지 않으며, 그 누구의 사연도 청승맞게 하소연하지 않는다. 인물과 사건 등에 대한 서사적 정보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공감 어린 화자에 의해 친절하고 말랑말랑하게 서술되는 대신에, 시간을 건너뛰고 순서가 뒤섞인 챕터들 사이에 조각조각 흩어진 채로 예상치 못하게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이를테면 자기를 뒤쫓는 우영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미라가 우영의 엄마를 따라 그의 집에 들어가 보는 상황은 미라의 관점에서 찬찬히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영 엄마와 아들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대수롭지 않게 슬쩍 언급될 뿐이다. 또 우영이 왜 '천석 패거리'에게 맞고 다니는지, 이 문제가 어떻게 친구 재혁이나 그가 주워온 개 왈리와 얽혀들어 있는지는 우영과 해미(재혁의 누나이자 우영을 좋아하는)가 만나 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남의 얘기하듯 가볍게 스쳐지나간다.

그런가 하면 우영이 '애견용품'이라 말하며 자동차 트렁크에 실은 물건이 알고 보니 미라의 사진이 담긴 앨범이었음은 트렁크 속 물건을 옮기던 강수에 의해 두 챕터 이후에야 밝혀지고, 그 앨범 마지막 장에 미라에게 보내는 우영의 메시지("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가 적혀 있었다는 사실은 다시 두 챕터가 지난 뒤에야 뒤늦게 앨범을 넘겨보는 현자의 눈을 통해 비로소 독자에게 알려진다. 심지어 강수와 태경이 우영을 구하는 가장 가슴 찡한 장면조차도 이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 현자가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얘기들'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꽤나 담담하게 처리돼 있다.

이렇듯 감정을 절제하고 말을 아끼면서 중요한 정보를 뒤로 돌리거나 딴 얘기들 속에 슬쩍 끼워놓는 방식은 괜찮은 척, 무심한 척하지만 실은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인물들의 여린 내면과도 어딘지 닮아 보인다. 징징거리거나 질척거리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와일드 펀치>의 매력은 무엇보다 우선 이 같은 서술 방식에서 나온다고 해야겠다.

햇살 좋은 정원에 이들이 모두 모여 화단을 가꾸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우영 엄마가 간직했던 작은 세라믹 천사 상에 담긴 "삶에 대한 한 가지 아름다운 상상의 이미지", 혹은 미라의 꿈속에 떠올랐던 "상상의 안식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이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며 어떤 시련도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5남매와 그들의 아이(완주)와 그들의 엄마(우영 엄마)와 그들의 개(우영의 왈리, 완주의 엘리)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삶,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직 알지 못하는 불안한 행복과 두려운 기대 앞에서 우리 역시 마음이 설레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상투적이고 자족적인 "힐링"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그들과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서로 힘을 내는 놀라운 경험이라 말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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