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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났다? 그것도 병이다!

[프레시안 books]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미국 출판 시장에는 '이론(theory)'이라는 모호한 장르가 있다. 딱히 도서관이나 서점의 도서 분류의 한 항목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그 텍스트의 내용과 태도 같은 내적 맥락이나 기원과 유통 같은 외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한 줄기로 묶일 수 있는 흐름이 있다.

이 장르는 1970년대 미국 인문학계, 그러니까 정확히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문학(철학, 역사학 등)보다는 영문학, 불문학, 비교문학 등 문학부 계통의 아카데미를 통해 도입된 동시대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주로 다루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비주류 철학과 이를 원용한 비평 이론, 정치철학 등을 포괄하며 흔히 '프랑스 이론' 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린다. (☞참조 문서 : 진태원의 '프리즘 총서를 시작하며' / 프랑수아 퀴세의 <루이비통이 된 푸코?>(문강형준·박소영·유충현 옮김, 난장 펴냄))

일본에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장르가 있다. 비슷한 점은 도입 시기는 좀 늦지만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산 이론들을 번역하여 들여왔다는 점이다. 비슷하지 않은 점은 이 흐름이 카레나 돈까스처럼 일본화되어 고유의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사상에서는 유럽의 이름들만이 아닌 일본인 이름들도 인용과 출처, 레퍼런스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의 일본인 이름을 연구자가 아닌 저자로서 내세운 책들이 출판되어 '사상'이라는 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2000년대 한국 출판 시장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 아즈마 히로키같은 이름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 일본 사상>(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의 옮긴이 송태욱의 말에 따르면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 사상계에 떠오른 새로운 신성이다. 그러니까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 일본 사상>의 구분을 거칠게 요약해서 갖다 붙이자면 아사다 아키라, 가라타니 고진, 아즈마 히로키에 뒤따르는 어림잡아 4세대쯤 되는 뉴 스타 사상가인 셈이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내가 이 책을 구매하고, 게다가 (쌓아 놓은 책들 중에서 먼저) 읽기까지 하게 된 데에는 이런 맥락에 대한 추측과 기대가 깔려 있었다.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약간의 자기 고백을 우회하고 싶다. 내가 지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던 시기, 2000년대 중반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한국판 '이론'과 '사상' 출판 시장이었다. 물론 이 흐름은 이 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읽히고 있었다. (☞바로 가기 : 김원, '운동으로서의 사회과학은 어떻게 되었나')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의 한국 출판 시장은 그 흐름을 이어받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양상, 남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 시기를 지적 고향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그런 차이를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같은 저자들이 읽혔지만 읽히는 방식이 달라졌다. 들뢰즈는 소수의 공동체들을 제외하고서는 출판 시장에서는 조금 한물 간 이름이 되었으며, 푸코는 논술 교재로 '전락'해버린 <감시와 처벌> 대신 콜레주 드 프랑스 수업의 강의들이 그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런 읽히는 방식의 변화는 포스트주의 담론의 맹목성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었다. 일상적인 것의 정치성을 강조하고 거대 담론의 폭압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본주의 사회 아래 계급 갈등 같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를 담론의 장에서 은폐하는 역할을 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읽히는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도서출판b'를 통해 주로 번역되어 들어온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두 사람은 개별 이슈에 있어 작은 논조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①포스트주의를 비판하며 ②그러면서도 프랑스 이론의 논자들을 동조든 비판이든 레퍼런스로 삼고 ③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의 거의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사상가로서 비평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나는 이들로부터 지적 삶을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나 젠더 정치학,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서 이들을 읽었을 때만큼 공을 들여 본 적은 없지만, 이들의 책을 읽고 나름의 입장 아닌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무엇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저자는 맞든 틀리든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비판해 줬기에 읽지 않은 이름과 생각들에는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있었고, 사상의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는 글과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논리 구조가 지치기 시작했다. "누구는 무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오독이거나 누가 무슨 무슨 정치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자신의 독서의 진정성과 타인에 대한 정신분석을 근거로 삼는 갑론을박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비판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애초부터 상호검증이 불가능한 것들을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사사키 아쓰시는 <현대 일본 사상>에서 이를 시소 놀이로 비유했다. 맑시즘을 비판하고 포스트 맑시즘을 비판하고 다시 맑시즘으로 돌아가고 돌고, 돌고….

그래서 그 시소 놀이를 떠나자는 마음에 지난 몇 년간 일부러 지젝을 사지 않았고, 한국인이 쓴 저널리즘 계열의 책을 주로 구매했다. 그러던 와중 다시 습관적으로 현대 사상의 책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시소 놀이를 떠난다는 시소 놀이 속에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새물결과 난장에서 나온 아감벤의 저작들을 사고, 그린비에서 나온 <알튀세르 효과>(진태원 엮음, 그린비 펴냄)를 샀다. 그러던 와중 포스트-포스트주의를 지향하는 출판 목록을 보여주고 있는 출판사 자음과모음에서 나온 4세대 현대 일본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의 책을 체념 반 기대 반으로 구매했다.

사사키 아타루는 예상과는 달리 나 같은 출판 시장의 자식은 아닌 듯 했다. 나와 비슷한 기대를 하고 던졌을 법한 "당신은 홀연히 나타났는데 지금까지 어디 뭘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살고 있었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 "살고 있음"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20대 때 내린 자신의 어떤 결단에 근거해 있다. 그는 또래들처럼 영화나 음악을 좋아하고 그것에 대해 비평하는 행동을 '거절'하기로 결단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행해지는 자율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른바 일본의 '사상'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다. 그에 편승해 나는-또 한 번의 시소 놀이일지는 모르겠지만-앞서 말한 내 지적 경로를 반추해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온갖 것들, 그 '모든 것'에 대해 "그거야 알고 있지. 이러이러한 거잖아, 그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에 의해 메타 레벨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사상이나 비평이라 불린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무척 기묘한 일입니다. '사상'이나 '비평'이라는 좁은 원에서 한 발짝만 바깥으로 나가면 모든 것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그런 자아를 추구하고자 하는 환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21쪽)

사사키는 그리하여 비평가 혹은 사상가들이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사람이 정말 지적 유행에 관심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몰래 숨어서 볼 건 다 보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의 예리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야 비평에 대한 비평에 불과하다. 사사키는 이 불만을 자신의 논의의 받침대로 쓸 수 있게끔 잘 가다듬는다. 그가 보기에 동시대 사상들은 매우 많은 정보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소화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오히려 읽지 못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비슷한 부분은 인용하고 다른 부분은 비난하면서 그들은 책을 말 그대로 피해갈 뿐이다.

사사키는 책이라는 사물 자체의 물리적 특성을 한 예로 들며,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한다.

"책이라는 것은 한 장의 종이를 여러 번 접고 재단하여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접어 '책'이 되면, 급하게 한 장의 종이로 만든 문서나 두 장으로 접어서 펼친 서류와 달리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몇 번 읽어도, 몇 번 눈을 집중해도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확신이 별안간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 '책'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79쪽)

하지만 이렇게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을 의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이 당연히 여기던 세상의 질서 역시 의심하게 된다. 프랑스 이론의 어휘로 말하자면 주체를 불안하게 하는 '타자'로서의 책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인해 개인 혹은 사회에 혁명이 촉발된다. 그는 루터의 성서 읽기, 마호메트의 코란 읽기, 중세 해석자들의 로마법 읽기에서 그 예들을 찾는다.

그러한 혁명의 결과 도래하는 것은 왕에서 인민으로의 주권 이동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교회법과 같은 것으로 인간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언어적 질서(성문화된 법)의 확립이다. 이 법은 일련의 현대 사상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폭력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직 순수하게 책을 다시 읽음으로서 형성되었다.

이런 논지에 대한 옳고 그름 여부나 더 세부적인 내용 설명은 사사키와 견줄 만큼 박식한 다른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자. 여기서 내 관심을 끈 것은 그가 이렇게 자신의 논의로 성을 쌓아가면서도 꾸준히 동시대 사상가들에 대한 코멘트를 이어간다는 점이었다. 그는 문학의 종언, 철학의 종언, 그러니까 이른바 책과 읽기의 종언을 이야기하는 현대 사상들이 지극한 자아 과잉에 빠져 있다고 계속 비판한다. 자신의 사는 시대에 종언이라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자아 과잉. 그것은 결국 읽지 못함이라는 무능에 대한 변명 내지는 읽지 않음이라는 게으름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

"문학이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달리 할 말이 있을 텐데도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고 말하며 뭔가 말한 듯이 우쭐해져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특권적인 시작이나 끝이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동안 역사상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병든 사고의 형태가 있습니다. (…) 그러나 이런 종말론적인 사고, '현재'에서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의 끝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든 병든 사고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새롭지 않습니다."(230∼231쪽)

요약하자면 '책과 혁명에 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책'이라는 사물과 '읽기'라는 행위에 대한 역사적 탐구이자 그 가치에 대한 변호이며, 동시에 사상가와 비평가들의 맹목에 대한 일갈이다. 외부를 향한 강한 자기주장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비판은 자기 자신의 자리와 뿌리에 대한 성찰에서 근거하기에 힘 있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딱히 쓰여 있지는 않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런 착각을 한 번 해 보았다. 사상가가 아무리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라며 이 주제 저 주제를 건드려도 그는 결국에는 책을 사고 읽고 쓰는 종류의 사람이다.

이런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섣불리 남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사사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는 삶과 앎의 불일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런 담론들이 줄곧 삶(현실)의 편을 드는 것과는 달리 앎(책)의 편에서 그리 말한다.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문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 뭐든지 결국은 경제라고 말한다면 처음부터 경제학자가 되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회사라도 차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의견으로 정치를 좌우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관료나 정치가가 되면 좋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비겁한 수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225∼226쪽)

물론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그 함정을 피하는 과정에서 정말 자신이 하는 일이 쓸모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무조건 기만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지는 못하겠다면 변명거리라도 찾아볼 궁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키는 그 정도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들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비꼰다. 앞서의 책읽기의 어려움 인용 부분(79쪽)에서 말했듯이 그는 책과 책 아닌 책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어지는 당연한 귀결로 그는 사상과 사상 아닌 사상을 구분한다.("이런 것이 사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인가요?"(159쪽))

이런 느낌들은 그저 내 멋대로 내 독서 이력에 대한 알리바이에 대한 논리를 이 책에서 착취했기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나는 과연 이 책을 사사키가 강조하듯이 나와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 '타자'로서 대한 것일까? 이런 개인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금 비뚤어진 시선으로 책을 보아도 문제는 있다.

우선 "단지 문자를 쓰는 것'만'이 특권적으로 권력, 나아가 혁명에 속한다는,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된 사고의 도정마저 답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172쪽)는 사사키 자신의 질문은 이 제한된 분량의 책에서는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거기에다가 종말론적 세계관의 맹목을 비판하기 위해서라지만 생물 종의 수명은 400만년이라며 호모 사피엔스의 수명은 아직 380만년이 남았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큰소리치는 대목들은 텍스트의 역사와 자신의 존재 사이의 연속성을 찾아낸 저자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살아보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을 시간의 규모로 자신의 시대만을 사는 개인들의 고민을 압사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인류와 문화, 책은 영원할지 모르지만 개인은 그 영원에 간접적으로만 함께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운한 기분은 든다. 간만에 책을 참 좋아하는 사람의 책을 보았다, 는. 그것도 생물학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내가 민망할 만큼 한참 후배이긴 하지만, 비슷한 무리의 책과 사고방식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이 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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