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죽음·욕정·증오, 그 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죽음·욕정·증오, 그 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프레시안 books] 백가흠의 <나프탈렌>

백가흠은 우리 문단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그의 이야기들은 먼저 우리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뒤에 한결같은 작가 특유의 잔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눈을 감은 뒤에 아련하게 남는 방식이 아니라, 미추가 뒤섞여 있는 우리의 삶과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주면서 주저하지 않고 눈 속으로 찌르고 들어온다. 그만큼 그는 단편 소설들을 통해서 세계를 읽어 내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꾸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전달해왔다. 그래서인지 백가흠의 첫 장편 소설 <나프탈렌>(현대문학 펴냄)을 그의 등단 이후 10여 년을 훌쩍 넘겨서야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믿겨지지 않는다.

소설은 특정한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죽음을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들이 맞물려가며 진행된다. 분량에 비해 다소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저 등장인물들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유형적 분류가 가능해지면서 그 분류의 기준이 되는 죽음의 문제로 다시 수렴되는 특징을 보인다. 줄여서 말하자면 <나프탈렌>은 죽음에 대한 성찰 내지는 죽음을 앞두고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행태에 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우연적으로 시작된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그토록 우위적 가치로 삼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이성 역시 보다 큰 범주 안에서 생각해 보면 우연성의 기반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현실을 깊이 있게 보고자 한 작가의 관심이 가학적 폭력이나 도착적 행위 등, 우리가 '비이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이내 던져두었던 것들에 가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이 탐구는 <나프탈렌>에 이르러 온통 불가해한 것들로 점철된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응집되어 있는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죽음이란 우연히 주어진 삶 속에서 유일하게 필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 역시 요양을 위해 지어진 '하늘수련원'이다. 즉, 최대한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은 여러모로 현실과 대척점으로 그려지는데, 현실과 하늘수련원 각각의 공간을 이끌어 가며 실제 가장 많은 서술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두 인물로 최영래와 백용현이 등장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인물이 정작 죽음의 회피나 극복에 가장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 <나프탈렌>(백가흠 지음,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하늘수련원의 인부로 일하는 최영래는 부인과 아이도 버리고 홀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서 한국에 정착한 뒤 어떻게든 북에 남아 있는 가족을 데리고 오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애를 쓴다. 특히, 자신이 교도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중죄인들을 수용하는 요덕수용소에 가족이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그가 벌이는 행위들은 모두 가족의 죽음을 막고자 저질러진다.

정년을 앞둔 교수 백용현은 더 이상 젊고 어린 여학생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억울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조교인 박사 과정의 여학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거나 자신의 후임 자리를 미끼로 제자를 동반하여 점심을 먹으러 춘천까지 운전을 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들은 그가 어떻게든 "죽지 않기 위해 젊어지길 원했으며, 죽기 싫어서 좋은 음식만 먹었고, 젊은 여자들을 탐"(25쪽)해왔던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이들은 정작 실제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접하는 순간, 자신의 삶 전체가 예기치 않게 변모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어렸을 때 한국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보게 되면서 죽음을 거부하게 된 백용현이나,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뇌물을 받고 거짓으로 죽음을 꾸며 수용자들을 빼돌려온 사실이 발각되어 탈북을 감행한 최영래 모두 그간 죽음을 추상적 사건이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 왔기 때문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게 만드는 죽음의 가치는 현실과 분리된 채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일 때가 아니라, 이마무라 히토시의 말대로 '죽음의 관념'에 의해 현실과 공존하는 죽음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애초에 삶과 죽음을 분리시켜왔던 현실에 실제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을 내딛게 되는 순간 그들의 삶은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두 인물 이외에도 실제 죽음을 앞둔 암 환자와 그 암 환자인 딸을 돌보기 위해 같이 요양원에 들어온 엄마, 갖은 종교를 거쳐 지금은 요양원을 운영하는 원장 그리고 이제는 유부남이 된 옛 애인을 불러내 지속적으로 만나는 여자(백용현의 조교)에 이르기까지 하늘수련원을 둘러싸고 직간접으로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찬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의 삶을 다시 살려내는 사람 그리고 거짓 죽음과도 같은 거짓 사랑으로 영문도 모른 채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당황스러운 기분이 드는데, 그것은 기존에 백가흠의 단편들을 읽고 난 뒤 인물이나 사건들이 선명하게 남는 것과는 달리 <나프탈렌>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다가오는 데서 비롯된다. 이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개성적인 인물들이 등장해서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당황스러움은 보다 크게 다가온다. 그것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맛있는 여러 가지 재료를 그저 한꺼번에 담아둔 그릇을 마주한 것과 같은 당황스러움이다.

다소 독립적으로 끌고 왔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한 소설의 후반부는 기계적인 배치로 보이면서 오히려 다루고 있는 여러 사건들이 하나의 질감으로 묶이지 않아 부담스럽게 읽힌다. 마치 풀릴 것 같지 않은 오해들을 한 번에 해결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말이다.

특히, 그답지 않게 빈번하게 개입하는 작가적 목소리는 그것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오히려 떨어뜨리고 만다. 따라서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소설 속 상황으로 독자들을 한 번에 옮겨놓는 백가흠 특유의 이미지 중심의 장면이 갖는 역할이 현저히 약화되어 버린다.

가령, <현대문학>에 <나프탈렌>의 연재를 시작하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단편 '통(痛)'(<창작과 비평>, 2011년 봄호)과 마지막 부분을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은 두드러진다. 주인공 '원덕씨'는 가난한 집안에, 월북한 아버지 그리고 월남전 참전 뒤의 고엽제 피해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 불쌍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권 다툼에만 이용당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힘들고 소외되었던 '원덕씨'의 생애가 한 달 치의 진통제를 한꺼번에 먹어 생긴 주인공의 환각 상태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백가흠 소설의 힘은 이처럼 설명을 최소화 하고 작가가 그려내는 상황에 독자들을 그대로 동참시키는 데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같이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주먹을 쥐었던 기억들이 강하게 남는 것이다.

세상의 접면에 과감하게 등을 돌리고 보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 들어가고자 하는 작가에게 어쩌면 등을 돌려 다시 얼굴을 보여 달라는 어리석은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으니까.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열심인 그의 등에 다시 가만히 양손바닥을 내밀어 대본다. 쉼 없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안심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