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인간 될 뻔한 침팬지, 왜 철창에서 죽었을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인간 될 뻔한 침팬지, 왜 철창에서 죽었을까?

[프레시안 books] 엘리자베스 헤스의 <님 침스키>

님 침스키는 부르기 위한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다른 침팬지들과 달리 성이 있는 침팬지였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문법이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노엄 촘스키의 지배적 이론에 반박하는, 동물도 훈련을 통해 언어를 익힐 수 있다는 B.F.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을 증명할 사명을 띠고, 선택된 영장류에게만 부여되었으며 태어나자마자 붙여진 그 이름이 님의 기구한 일생을 암시했다.

출생 직후 어미에게서 강제로 분리된 님은 맨하탄 어퍼 이스트의 상류층 가정에 입양되어 인간 유아와 똑같은 대접을 받고 자란다. 기저귀를 차고 식탁에 앉아 디저트를 먹었으며, 인간 형제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며 스스로를 인간이라 믿도록 길러졌다. 프로젝트 님을 지휘했던 허버트 테라스 박사는 님이 성장함에 따라 그 수화 능력을 검증하고 통제하기 위해 넓은 정원이 딸린 대저택으로 옮겨 살게 하면서 컬럼비아 대학으로의 등하교 수화 수업을 시도하나, 밀폐된 공간을 싫어하는 님 때문에 실패한다.

실험의 부진과 자금의 압박, 점점 크게 자라나며 난폭해지는 님이 벌이는 사고들에 지친 테라스 박사는 결국 프로젝트 님을 포기하고, 님은 제 어미가 살았던 영장류 연구소로 돌려보내진다. 침대에서 자며 생일에는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불어 끄던 응석받이 침팬지는, 영장류 연구소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난생 처음 다른 침팬지를 만난다.

연구의 진척과 돌봐주는 사람들의 사정이 바뀌는 대로 줄곧 버림받으며 내리막길을 걷던 님은, 결국 영장류 연구소의 자금 문제 때문에 간염 백신의 효과를 침팬지에게 시험하는 동물 실험실로 들어가게 되지만, 님을 '특별한 침팬지'라 믿는 인간 친구들에 의해 생체실험을 가까스로 면하게 되고, 마침내 학대당하거나 위험에 처한 동물을 보호하는 농장으로 옮겨진다. 거기서 님은 16년을 살았고, 평균적인 사육 침팬지의 수명의 반밖에 안 되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 <님 침스키 : 인간이 될 뻔했던 침팬지>(엘리자베스 헤스 지음, 정호연 옮김, 백년후 펴냄). ⓒ백년후
침팬지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영장류이며, 침팬지가 인간에게서 분리되어(혹은 인간이 침팬지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지는 600만 년밖에 안 되었다. 인간과 99퍼센트의 DNA가 일치한다. 복잡한 역학관계를 가진 무리를 이루어 살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식하는 고등한 동물로서 인간을 닮았다는 이유로 각종 행동실험과 임상실험에 동원되어왔다. 생체실험에 동원된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의 예는 가장 흔히 쓰이는 쥐부터 전쟁 포로까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널리 관찰되며, 실험에 사용되는 생물은 종을 불문하고 그 실험이 가져오는 이득에서 최소한 어느 순간은 배제된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신체나 정신의 훼손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실험 대상과 실험으로 인해 혜택을 보는 집단 간의 지위 차는 더욱 벌어진다. 동물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그러므로 인간에 한층 더 가까운 존재이며,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던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동물은 우리와 같지 않다는 명제는 진실이며, 여러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름'을 '열등함'으로, '열등함'을 '피지배의 충분조건'으로 치환시키는 논리가 보편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추세에, 동물은 왜 여기에서 배제될까? 단순한 종 차별주의로 치부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논쟁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언어 사용의 여부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당사자성이다.

언어가 없다는 것이 동물을 의식 있는 존재로 규정하여 권리를 부여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면(동물학자들이 다루는 소박한 형태의 언어나 유사 언어를 제외한, 문법 구조를 갖춘 언어), 동물에게 언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의 성공은 생명윤리의 당위성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을 터였다. 동물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궁극적인 질문은 언제나 '실증 가능한가'였다. 침팬지의 고독은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침팬지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최소한 연역적으로 유추할 수는 있다. 척추동물의 신경 체계를 가졌으니 그 느끼는 고통도 비슷할 것이다.

<동물 해방>(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펴냄)의 저자이자 실천윤리학의 창시자로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피터 싱어는 '고통을 느끼는가'의 여부가 동물의 '권리 있음'을 가늠하는 기준이라 주장한다. 이것으로 충분치 않은 것일까? 님의 일생은 '동물이 지금보다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 소비 당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왜 사람들은 애초에 철창 안에서 죽게 내버려둘 침팬지와 대화하고 싶어 했을까? 님은 150개에 달하는 단어를 수화로 익혔고 실제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이를 사용했다. 님을 돌보았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것이 언어로 정의될 수 있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분명 수화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테라스 박사는 님을 영장류 연구소로 돌려보내고 2년 후 <사이언스>에 영장류 언어를 전면 부정하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연구자들이 침팬지에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때까지 다양한 신호를 보냈으며, 님은 이에 반응한 것뿐이라는 결론이었다. 님 침스키는 결국 촘스키가 옳았음을 반증하는 이름이 되었다.

프로젝트 님에는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침팬지를 먹이고 재우고 돌본 사람들, 새로운 수화 교수법을 시도한 사람들, 자금을 대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모두 이 침팬지에게 조금씩 다른 기대를 했고 서로 다른 것들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독특한 성격과 사연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에 등장하는 십수 명의 사람들 모두 각각의 전기를 따로 내도 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님이 구조되어 나온 실험실의 책임자였던 제임스 마호니의 경우, 애초에 감금 자체가 '실험동물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라는 명제를 모순으로 만드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적인 동물 실험은 없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동물실험의 본질에 꿰뚫어보고 있었던 이 수의사는 수화를 알 줄 아는 영장류를 실험실로 보내야 했다. 그는 실험 침팬지의 복지를 위한 보육원 설립을 꾸준히 주장했으며 침팬지들이 느낄 고통을 줄이려 애썼고, 이후에 실험실이 폐쇄될 때 가능한 한 많은 침팬지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프로젝트 님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스테파니 라파지는 님이 아주 어린 새끼였을 때부터 세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처럼 돌보았고 비록 낭만적이고 안일한,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것이었을지라도 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이 불편을 겪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님을 옹호했으며, 강제로 진행되는 수화 수업에 반대했다. 그녀는 실험 책임자와의 실랑이 끝에 결국 님을 포기한다. 수년이 흘러 다른 대모들의 손을 전전하다 결국 영장류 연구소에 갇힌 님의 우리에 들어갔다가, 분노한 '버려진 자식'으로부터 내동댕이쳐져 피투성이가 되지만 스테파니는 님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동물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선의를 가졌대도 마찬가지이다. 동물은 털가죽과 언어를 장벽으로 철저히 타자화된 '사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그 무엇'으로서 소비될 뿐이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운 새끼 침팬지는 가족의 막내였다가 어느 순간 친척집에 줘버린 개와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가 인간이 불쑥 다시 찾아가면 반겨주길 근거 없이 기대 받는, 끊임없이 단절되고 부정당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동물은 우리의 인식 안에서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며, 동물에게 정신이 있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 실험조차 이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동물 전문 저널리스트가 프로젝트 님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취재해 써낸 이 책은, 주요 등장인물의 성장 배경과 성격, 그 가족과 주변 인물을 모두 묘사할 정도로 인간관계에 큰 비중을 할애했다. 이것이 침팬지에 관한 이야기인지 관련자들의 연대기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페이지가 인간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일견 지루해 보일지 모르나, 저자는 '님 침스키는 불쌍했다, 인간들은 잔혹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독자에게도 그런 결론을 유도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주인공인 침팬지만큼 자세히 묘사했다고 여겨진다.

프로젝트 님은 기괴할 정도로 새로운 시도였다. 학술 연구를 위한 실험이었으나 거의 통제되지 못한 상태로 엄청난 욕망과 감정과 관심 속에서 표류했고, 동물에게 마음이 있다고 전제하고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다루다 막을 내렸다. 비록 님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전전하다 버려졌을지라도, 동물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오려던 사람들 역시 혼란스럽고 좌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간이 될 뻔했던 침팬지, 님 침스키>(엘리자베스 헤스 지음, 장호연 옮김, 백년후 펴냄)는 종간 이해를 위한 노력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언어와 언어의 경계는 여전히 언어학자와 동물학자에게 완전히 다른 기준이다.

'인간처럼 말하는' 동물을 포기한 가운데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은 "껴안기, 소리치기, 손뼉 치기 등과 같은 비언어적 소통 양식이 언어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동물이 인간의 언어로 말할 줄 알게 된다면, 인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비언어적 소통을 무시하는 한, 그래서 동물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부정하는 한, 기만이 없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쪽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