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이콘(icon)이라는 말이 '유사물'을 뜻하는 그리스어 'eicon'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이름은 보다 넓은 의미로 쉽게 확산되는 그만큼 작품 세계에 내재된 본질을 손쉽게 우회해 버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황석영의 작품은 언제나 '현실'과 '역사'라는 양손으로 쥘 수 있는 한에서만 기능해왔던 셈이다.
세상과 대결을 하면서 작품을 쓰는 소설가들에게 마냥 중립적이길 바라는 것도 어불성설일 텐데, 황석영의 경우처럼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소설 외적인 클릭을 통해 조회 수를 늘려가고 있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방북과 수감 생활로 집약(?)되는 황석영의 외적 행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 쓰기 방식에서 비롯된 작품 내부에도 역시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의 어리석음을 감안하고 말하자면, 황석영이 자신의 관심을 언제나 인물에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야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유달리 역사적인 사건들을 작품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다소 특별해 보인다. 흔히 역사의 현장에서 인물들의 개성은 흩어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석영의 인물들이 돈키호테나 햄릿처럼 사건이나 배경을 장악하고 이끌기 위해 특별하게 창조된 '캐릭터'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의 역할을 부여 받는다 해도 그의 인물들은 <장길산>(창비 펴냄)이나 <심청, 연꽃의 길>(문학동네 펴냄)에서처럼 애초에 부여된 역사적 의미 범위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무기의 그늘>(창비 펴냄)에 등장하는 핵심적 인물 중의 하나인 '안영규'처럼 오히려 자신이 뛰어든 현실에도 철저하게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오래된 정원>(창비 펴냄)의 '현우'처럼 후일담 속에서 스스로 복제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역사와 인물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황석영이 거둔 수많은 소설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앞선 언급에서처럼 그가 인물에 보다 주목하게 되면 역사적 의미의 다양성이 개인의 판단 안으로 함몰되어버리고 만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 최근작인 <강남몽>(창비 펴냄)과 <낯익은 세상>(문학동네 펴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인물들은 생명력을 빼앗긴 채 역사적 의미에 압사당하고 만다.
▲ <여울물 소리>(황석영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여울물 소리> 역시 시간적 배경으로는 임오군란이나 갑오농민전쟁 등 우리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앞선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고 나면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들이나 목숨을 걸었던 당대 사람들의 결기들은 어느새 모두 부질없는 기억으로 아련해지고,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끝내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었던 '이신통'과 '연옥'의 이야기 속에 오히려 묻혀 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독자들로서는 인물들의 내면에 공감을 하면서도, 그 인물들이 겪어낸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기보다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을 손쉽게 내리게 된다.
가령, <여울물 소리>는 서얼 출신으로 태어나 벼슬에 대한 뜻은 접을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이신통이 과거 시험을 핑계로 집을 나와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떠돌면서 겪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주인공은 전기수, 재담꾼 등의 직업을 가지면서 임오군란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종국에는 '천지도'에 입도하면서 당시 조선의 혼란스러웠던 역사 한복판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굳이 동학을 '천지도'라고 가공하면서 보여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역사적으로 벌어졌던 사건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의미들을 재연하지는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이신통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독자들로서는 바로 이 때 주인공의 행동에 대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일차적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문제는 이 평가의 순간에 독자들은 주인공의 내면과 관계 맺기를 끊어내고, 이어서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교과서 속의 정보로 전락된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여울물 소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초기 중·단편 소설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황석영은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역사를 파고들어가 이야기가 놓일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는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인물의 삶에 끈질기게 들러붙는 우리의 역사를 그려낸다.
보다 눈여겨 봐 두어야 하는 것은 주인공의 행적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소설 구조상 아내 연옥을 통해 그것이 드러나는데,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불과 몇 개월 같이 산 시간밖에 없는 연옥이 남편의 소식을 알아내고자 그의 고향이나 또는 잠시 머물렀다고 소문을 들은 곳,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만나기 전 부부로 맺어졌던 여인의 집에까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다닌 덕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 낸 남편의 지난 행적들은 연옥의 시선이 아니라, 그것을 연옥에게 전해주는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직업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상당 부분 재담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면서 소설 전반을 우리 고유의 서사 구조를 가진 사설(이야기)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처럼 <여울물 소리>는 작가의 앞선 작품들과 상당 부분 같은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우리 역사에서 성행했던 민중들의 이야기 형태를 통한 전달 방식이라는 측면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이는 소설 기능상, 작품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역사나 그것과 긴밀하게 결합된 인물들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독자들의 판단을 지속적으로 유보시킨다.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냉정한 판단에 뛰어들게 되지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다. 자연스러운 질문과 호응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역사를 밟아 갔던 인물들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복 구문이나 불필요하게 보일 정도로 확대된 장면, 또는 첩어 등으로 구성된 우리 이야기의 형태상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서구를 통해서 수입된 근대 소설 장르와 달리 우리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방향적 서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주치게 되는 매순간들에 최대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작은 생명까지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저마다의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공감과 호응을 유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를 통해 역사적 당위성에 가려지고 희생된 윤리적 가치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하지만 작품의 의미와는 별개로 소설을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쉼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정보-라고 말하는 것-들을 습득하기에 바쁜 최근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이 도시적 불연속성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어쩌면 고장 난 서사쯤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과연, 수년 만에 만난 남편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449쪽)을 끊고 이틀 밤만을 지낸 뒤 스스로 물러나오는 연옥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세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작가'라는 이름은 점차 사라져가고, 독자와의 세대 간 차이를 걱정해야 하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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