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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엄마의 '신공', 당연하게 여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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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엄마의 '신공', 당연하게 여기지 마!

[프레시안 books]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

"엄마랑 기자, 이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푸념 아닌 푸념을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얼마를 지내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18년차 기자이자 15년차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밤이나 주말에도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느라 '산만'하게 보내기 일쑤다.

자연히 뒤로 밀린 가정 일은 하루 중 요술처럼 뽑아내는 짧은 시간 안에 구겨 넣어야 할 경우가 많다. 점심 혹은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아이가 요청한 준비물이나 과제 자료를 구하러 다녀야 하고 그런 이동 중에 시댁에 전화를 하거나 가전제품 애프터서비스 일정을 조율하는 등 각종 개인적 용무를 처리한다. 옆에서 나를 지켜본 누군가는 탁구공처럼 정신없이 굴러다닌다고 하지만, 내게는 익숙해진지 오래다.

한번은 밤 열두 시가 다 돼 퇴근했는데 딸아이가 "내일 가져갈 체육복이 없다"고 울상이다. 아치 싶어 허겁지겁 세탁기 빨래더미 속에 박힌 체육복을 꺼내 손빨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해 다리미와 드라이를 돌려 말리고 나니 새벽 세 시.

물론 이 같은 사건이 한두 번은 아니다. 매니저를 자처하는 엄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시대에 그들의 발끝을 따라가는 건 고사하고 최소한 기본적인 엄마 구실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무늬만 엄마'다. "아, 엄마만 하면 나도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자책하는 나에게 "괜찮아. 엄마 덕분에 내가 독립심은 누구보다 강해"라는 딸아이의 위로가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랄까.

▲ <기획된 가족>(조주은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주위에는 비혼 혹은 미혼인 후배 동료들이 많고 친구들도 대부분 전업주부다. 친구들에게선 "왜 그러고 사느냐"고, 후배들에게선 "선배를 보니 결혼하는 게 보통일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내게 현대사회의 가족관계에 천착해 온 저자 조주은의 <기획된 가족>(서해문집 펴냄)은 무릎을 치며 "내 이야기"라고 감탄할 수 있는 따뜻한 공감인 동시에 가슴 아픈 자각이다.

맞벌이 여성의 힘겹고 고달픈 일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맞벌이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그 여성들이 과연 행복한가 하는 질문이 이 책을 쓰게 된 관심의 출발점이라고 밝힌다.

2009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맞벌이 남편과 비맞벌이 남편이 가정 관리에 참여하는 시간은 각각 24분과 19분으로 별 차이가 없다. 반면 맞벌이 아내가 사용하는 시간은 2시간 38분에 이른다. 이는 명목상 엄밀히 규정할 수 있는 '가사노동'에 국한된 시간일지 모른다.

여성의 일은 시간의 경계자체가 모호하다. 남성인 배우자는 유급노동 중심의 일상을 보내지만 어머니이면서 노동자인 여성들이 보내는 일상의 시간은 남성의 그것과 비교해 질과 밀도가 다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압축적 시간경험'이라고 명명한다.

저자의 인터뷰에 응한 20명의 인터뷰이(서울 지역에 거주하는 정규직 여성, 미성년의 자녀를 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님)가 생생하게 전하는 압축적 시간경험은 시쳇말로 '신공' 수준이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남편의 출근을 배웅하고 설거지를 한 뒤 자신의 출근까지 준비해 집을 나서기까지 1분간의 오차도 없이 한 시간 만에 이뤄지는가 하면 퇴근 후에도 동시간에 여러 가지 목적의 일을 한꺼번에 해내야 하는 일상은 지속된다.

압축적 시간 경험은 '가정관리'라고 구분 지을 수 있는 시간의 범위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출근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해 아이들의 학원비를 송금하고, 가족이나 아이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가족관계를 관리하고, 틈틈이 아이의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학사일정 등을 챙기는 것은 여성의 노동시간 전반에 존재하는 압축적 시간경험이다.

뿐만 아니다. 여가시간조차도 남성과 여성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르다. 가령 주말을 이용해 남성은 혼자서 등산을 가거나 골프를 치며 여가를 즐길 수 있지만 여성은 아이와 함께 사우나에 가서 아이를 씻겨주고 자신도 즐기는 잠시의 활동을 여가로 인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친구 모임에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는 것도 순수한 여가라기보다는 자녀 돌봄 활동과 중첩된 압축적 활동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압축적 시간경험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왜일까. 그건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휴대전화나 인터넷 같은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시간 대비 성과에 민감한 신자유주의적 속도경제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들은 세상 어디에 있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자녀와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 연결돼 있고 이 같은 방식으로 자녀들과 접촉하고 계획을 짜며 관리한다. 이 같은 특성은 여성들에게 노동량을 증가시키고 긴장의 시간을 연장시킨다.

"이런 '돌봄 노동'(업무 시작 전 혹은 점심시간, 공식적인 업무 후에 인터넷 뱅킹, 홈페이지 방문, 문자메시지, 휴대전화로 가족과 관련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참여자 스스로도 노동으로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몇분, 몇초 안에 이루어지는 순간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관리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참여자들은 분주한 일상 속의 그 짧은 특정 순간을 긴장하며 기억하고 있다가 실행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특히 여성들에게 노동량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185페이지)

언뜻 생각하기에 맞벌이 부부라면 오히려 성 평등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저자 역시 맞벌이 가족에 관심을 기울인 큰 이유로 성 평등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을 꼽았다. 그렇지만 맞벌이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사례를 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이 같은 생활을 감내한다. 왜 그럴까.

많은 여성의 압축적 시간경험을 토대로 지탱되고 있는 맞벌이 가족의 엄연한 실상은 결국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한국사회의 현실과 맞닿는다. 저자는 여기서 이 같은 중간계급의 맞벌이 가족의 존재를 직시해내고 이를 '기획된 가족'이라고 명명한다. 즉 신자유주의 속도경제에 편승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부부관계는 경제적 동맹자로서의 관계라는 이야기다. 서로를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닌 공동의 생계부양자로 인식하고, 중산층 계급을 재생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 가족은 각자의 자원을 합리적·효율적으로 결합해 가계를 운영한다.

이 같은 운영방식은 자녀와 관계를 맺는 과정, 친족관리 과정에도 적용된다. 주중의 장시간 노동으로 전통적 의미의 가족적 결속력이 위협을 받지만 이는 주말에 집중되는 물질적 소비를 통해 일정 부분을 해소한다. 쇼핑과 장보기, 외식, 각종 문화 여가활동 등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주말은 저자의 지적처럼 '(가정의) 품질관리 시간'인 셈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자원을 통해 가족의 결핍을 해결하고 갈등을 해소해내고 있는 것, 좀 더 엄밀히 말해 해소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부부의 불평등한 관계를 고착화시킬 뿐 아니라 성별 간·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안전망 구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친족관계를 활용한 가족주의 전략에 대해 저자는 장기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까지 일갈한다. 보육과 교육, 노인복지 등의 문제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임에도 사적 복지로 해결하려는 욕구가 공공보육, 교육, 노인복지 강화 요구를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 역시 이 같은 질문에 몹시 곤혹스럽다고 고백하면서, 현재의 친족연계망에 기댄 가족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과 방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해결된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손이 덜 가게 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나아질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가족 담론을 던지며 아픈 고민을 하게 만들 저자는 다행스럽게도 책 맨 마지막 페이지에 해법의 단초를 던져놓았다.

"신자유주의 속도경제, 자본의 무한번식을 누그러뜨릴 방법은 없는 듯 보이지만 다행히도 그것들이 강요하는 무한경쟁이라는 열차에서 내려오려는 사람들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내 아이들도 다음 정류장에서는 내리도록 내가 도울 것이다. 나 역시 조만간 하차하려 한다."

그의 다음 책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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