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양가감정이 생긴다. 호기심과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든 것이다. 몇몇 철학자의 책은 나도 예전에 읽어보기 위해 시도했던 적이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펴냄)은 앞의 몇 장 넘기다가 비슷비슷한 개념어의 차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서 집어 던졌고, 들뢰즈는 해설서라고 써놓은 책도 이해가 가지 않아 책장을 열었다 덮기를 반복했다. 과연 이 어려운 철학서를 써내는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을까? 미술에 관해 쓴 것이니 좀 쉽게 썼을까? 아니, 이 책은 한국의 철학 연구자들이 그들의 글을 설명하거나 해설해 주는 것이니 이해할 만하게 해놓지 않았을까?
▲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조광제 외 지음, 알렙 펴냄). ⓒ알렙 |
다행히 이 책은 철학자들의 책을 바로 읽는 것보다는 책장이 수월하게 넘어간다. 게다가 주제들은 하나같이 흥미롭다. 예전에도 읽어본 적이 있는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근원>(예전사 펴냄)은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다. 농부를 그릴 때는 농부가 되어 짙은 땅의 색으로 가난한 그들의 식탁과 공간을 그려내려 했던 고흐였으니 그가 그린 구두 한 켤레에서 노동의 힘겨움과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촌부의 삶을 읽어내는 일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사실, 하이데거가 그 구두를 촌부의 구두로 해석한 것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마이어 샤피로가 지적한 대로 그게 촌부의 구두가 아니라 고흐 자신의 구두였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그림에는 '구두'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난한 누군가가 매일 신고 흙을 밟고 노동을 하고, 살아내려 애쓰면서 겪었을 온갖 풍상이, 우직한 품성이, "거친 바람이 부는 들녘의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완고함"이 내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촌부의 삶이나 고흐의 삶이나 그 고단함과 분투, 환희와 절망을 오가는 삶의 역경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사물의 참모습"이 그 "고유한 무게"가 예술 작품에서 드러난다고 쓰는 것이다. 다만 "존재자", "존재", "실존", "사물성"과 같은 골치 아픈 개념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예술 작품을 통해 사물 속에 숨겨진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을 뿐이다.
또 하나,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주디스 버틀러가 분석한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었다. 1990년대 중반인가,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 그림이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었을 때, 당시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그 떠들썩한 소동을 경험했다. 막상 그 그림을 보러 갔을 때 어두운 조명의 작은 방으로 몰려들던 관객의 어마어마한 숫자에 놀랐고, 그 그림이 예상보다 훨씬 작은 크기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있다. 130여 년 간 대중의 눈에서 감춰져 왔던 여성의 성기 그림을 이 철학자는 어떻게 '읽었을까?'
버틀러는 쿠르베가 그것을 "비어 있음", "결핍"으로 세상 앞에 드러냈다고 쓴다. 하기는… 성이 하나밖에 없다고, 그것은 페니스가 달린 남성 하나라고 생각했던 서구에서 여성의 성은 "결핍"이거나 "부족한 그 무엇"이었으니 그런 독해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감춰져 왔던 것, 숨겨왔던 것, 온 세상이 그곳을 통해 생겨났으나 세상에 드러내놓고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낸 것이라는, '리얼리즘'에 충실한 화가의 선택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저자의 주장대로 그 그림이 주는 느낌이 "공포"이며, 여성의 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남성의 상징체계인 '언어'로써 '정복'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그려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이 그림에서 여성의 몸이 위압적인 것은 그것이 여성의 몸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상실된 동성애의 욕망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하면, 그 그림이 공포라는 감정을 유발하는 이유가 (이 그림이 공포를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도 좀 의문이지만) 그림에서 여성의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더구나 그 욕망이란, 다름 아닌 지금껏 억압되었던 '동성애의 욕망' 때문이라는 주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이것을 철학자들의 "이성을 넘어서려는 시도"에서 나온 새로운 눈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보통의 다른 인간들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한계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하나 더 있다.
들뢰즈는 잘 알려진 대로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펴냄)라는 책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분석했다.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은 쉽게 풀어 쓴 해설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들뢰즈의 개념어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남성학적 관점에서 본 미술을 설명할 때 베이컨의 그림을 종종 인용하는데, 그때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남성적 주체에 대한 의심"이거나 그러한 남성적 주체의 해체를 이야기한다. 재현적 그리기를 포기하고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면서 "감각 덩어리"가 되어버린 동물적 형상에서 "겉모습 너머에 있는 존재의 특별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욕망의 재배치", "기관 없는 신체" 등과 같은 어려운 철학적 개념은 놓아두고서라도,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뭉개지고 조각난 "감각 덩어리"인 얼굴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해체하고 제도 또한 분열하려는 욕망을 읽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생각한다. 예술가들도 그렇지만 철학자들도 상상력이 대단하구나… 그들은 정말로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남들은 쉽게 연결시키기 힘든 어떤 것을 보는구나.
재미있게 읽은 또 하나의 장은 아도르노와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다. "예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한 사회를 부정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던 아도르노가, 그래서 사회적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리얼리즘도 진정한 예술이 아니며 예술을 위한 예술인 순수 예술은 더더욱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 아도르노가 살바도르 달리라고 하는 지극히 반정치적인 예술가의 그림을 사랑했다고? 핵폭탄이건 히틀러건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순전히 미적인 관심에서만 주목했던 달리의 그림과 아도르노라니, 재미있지 않겠는가?
아도르노는 예술이 정치적인 도구성과 거리를 둘 때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힘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사회적인 것과 거리를 두었던 초현실주의나 아방가르드 미술이 리얼리즘 계열의 미술보다 더 나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도르노는 달리의 그림을 사랑했다기 보다는 순수 예술을 주창한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보다는 차라리 예술적 형식에서의 혁명이나 사회 혁명의 양극단과 거리를 두었던 달리가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달리는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극히 상업적인 작가로 성공을 거두는데 이것은 결코 아도르노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미학 이론>(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달리의 그림이나 초현실주의 작품을 다리로 삼아 "고도로 관리되고 심지어 위기도 안정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예술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그의 결론은 "자율적이지만 사회와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언뜻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말을 구체적인 예술 작품으로 실현해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읽어내는 일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흥미롭다. 1844년에 그린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고단한 현실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를 지키는 정신을 말했던 사마천과 공자까지 떠올리고, 그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문자의 '향'이라 할 정신을 볼 것을 이야기한다. 1905년에 그린 세잔의 '대수욕도'를 보며 메를로퐁티는 인물이나 풍경도 하나의 사물로, 순수한 색으로 넘쳐나는, 그 색들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서로 상호작용하는 리듬감 넘치는 우주의 공간을 본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그렇게 기술이 발전된 사회에서, 대량 복제라는 복병을 만나 예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발터 벤야민은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을 분석하며 이야기한다. <말과 사물>(이규현 옮김, 민음사 펴냄)의 저자인 푸코는 르네상스 그림과 바로크 그림을 비교하면서 기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정확한 비례와 원근법에 입각한 르네상스 그림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바로크 그림에서 어떻게 의심되고, 분열되고 확정 지을 수 없는 인간으로 표현되는지에 대하여 꼼꼼하게 써내려 간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와 마르크스의 연결은,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하기 위해 미술 작품을 도구로 이용한 듯한 의도가 너무 두드러지고 들뢰즈는 읽긴 읽었으되 "꼭 이렇게 어려운 말로 써야 했을까?", "내가 이해하긴 이해한 건가?" 하는 의심을 하게 했다. 아무리 아도르노가 대중의 생각하는 힘을 빼앗지 않기 위해, 대중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쉽게 쓰는 책을 경계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이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는 써줘야 하지 않는가, 하는 푸념도 했다.
그러나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보면서 이토록 다양하고 심오한 생각들을 펼칠 수 있는 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놀라우며 그것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미술 비평서이다.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소설가는 소설가의 눈으로, 미술사학자는 미술사학자의 눈으로 작품을 보는 것처럼 철학자는 철학자의 눈으로 작품을 보는 것이니 왜 작품을 보면서 너의 사상만 이야기 하는가라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서 좀 머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어머나, 머릿속이 하얗다. 대체 내가 뭘 읽은 거야?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을 다시 펼쳤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내용이 새롭다. 나는 아직 그들의 언어에 전염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낯선 개념어는 마치 여러 번 반복해서 맞아야 하는 예방주사처럼 몇 번이고 맞아서 그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읽자마자 휘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방법은 없다.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책 표지가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제목이 쿠르베의 '자화상'이 아니라 '절망한 남자(The Desperate Man)'다. 글을 쓰려고 앉은 나는 표지 속 남자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망연자실해 있었던 것이다. 참 절묘한 표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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