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만화는 당연하게도 에마뉘엘 기베르의 작품이기도 하다. 앨런 코프의 구술을 취재해 아무런 가감도 하지 않은 듯 묘사했지만 사실은 섬세한 결로 서사를 이어붙이고 작가로서 그 당시를 재현했다. 만화 안에 현재 시점의 앨런 코프의 내레이션을 해설처럼 깔아가는 과감함 역시 작가의 전략이다. 해설은 그림을 반복해 설명하기보다는 그림을 자료화면 삼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또 다른 목소리다.
작가 에마뉘엘 기베르는 서문에서 "거리에서 길을 묻다가 앨런 코프를 만났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때가 1994년 6월이었는데, 앨런은 예순아홉 살이었고, 나는 서른 살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앨런은 미국에서 태어나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유럽에서 근무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프랑스로 이민을 와 미술을 공부하고, 군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사람이다. 이렇듯 앨런 코프의 삶이 복잡하게 된 근본 원인은 전쟁이다. 하지만 <앨런의 전쟁>에서는 전쟁을 평가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앨런 코프가 열여덟, 어른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나이에 군인이 되고 그 이후에도 전쟁에 통째로 붙잡힌 삶을 사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이 점이 <앨런의 전쟁>이 지닌 강점이다. <앨런의 전쟁>은 우리 모두가 은퇴한 뒤 대서양의 작은 섬에서 살고 있는 앨런 코프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어 그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게 한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전쟁에 참여한 그들의 일상은?
▲ <앨런의 전쟁>(에마뉘엘 기베르 지음, 차예슬·장재경·이하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
스펙터클은 일상을 지운다. 전쟁은 여러 콘텐츠에서 반복되어 활용되지만, 하나같이 일상을 뺀 스펙터클만 있을 뿐이다.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하는 일상은 전쟁 이야기에서 은폐된다. 혹여 조금이라도 일상이 보였다면, 그건 전쟁의 스펙터클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전쟁에도 일상은 흐른다. 어느 전장이라도 주야장천 모든 시간을 싸움에 허비하지 않는다. 아무리 군인이라도 전장의 삶과 함께 일상의 삶이 공존한다. 그리고 바로 <앨런의 전쟁>은 전쟁의 스펙터클 대신 일상을 보여준다. 앨런 코프가 전쟁의 일상만을 구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작가 에마뉘엘 기베르는 일상을 선택했다.
<앨런의 전쟁>이라는 책 제목에 교정이 필요하다. 조금 더 정확한 제목이라면, <전쟁에 나간 앨런> 정도가 좋겠다. 운율을 그대로 살리면 <전쟁의 앨런>이다.
전쟁 만화의 스펙터클을 기대하게 만드는 제목을 다른 방향으로 순화시키는 건 표지 그림이다. 책 표지에는 미군 정복을 입고 손에 담배를 들고 사진을 찍은 듯 서 있는 앳된 앨런의 모습이 있다. 어디에도 전쟁의 참화는 없다. 대신 캘리포니아에서 신문 배달을 하던 소년이 어색하게 군복을 입고 담배를 들고 있는 낯설고 이질적인 모습만 있다.
1부(한국어판은 3권을 합본해 1권으로 묶었다. 1부는 프랑스판 기준 1권이다)는 이제 막 군인이 된 앨런의 이야기와 훈련소 이야기, 훈련을 끝내고 유럽으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이제 막 군인이 된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좌충우돌이 있지, 적군에 대한 적개심이나 애국의 신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앨런의 회고에도 "내 나이 열여덟, 미국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징병됐습니다"란 설명이 나올 뿐이다. 새벽마다 신문 배달을 하던 일상에서 전혀 낯선 일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앨런의 전쟁>에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는 건 군인이 된 이후 만났던 사람들이다. 전쟁이 아니라.
1부에는 훈련소에서 만난 활발하고 운동을 잘하는 '루'가 나온다. 앨런과 루는 훈련이 끝난 뒤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다니거나, 한밤중에 훈련장에서 음식을 훔쳐 먹거나 영화를 보러간다. 훈련소 이야기 끝에 징발한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도착하는 것으로 1권은 끝난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훈련소의 과장된 괴로움 대신 훈련소의 일상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드러나 있다.
스무 살의 전장
1945년 2월 19일 스무 살이 된 앨런이 프랑스에 도착하며 2부가 시작된다. 파리를 거쳐 노르망디 그루네-앙-브래에 주둔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특별한 전투는 없다. 한밤중 친구 부대를 찾아가고,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프랑스 여자친구 집에 가서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앨런의 회고에 의하면, 그루네 체류 기간 중 있었던 위험한 일은 헛간 2층에서 떨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일로 전쟁이 끝난 후 퍼플하트 훈장을 받는다.
앨런은 프랑스에 도착해서 어디론가 이동하고, 그곳에 가서 누군가를 만난다. 자질구레한 일상이 진행되고, 그 일상을 하나하나 기억해 구술한다. 작은 사고와 위험들이 있었지만 독일군이 항복하고 전쟁은 끝난다. 보통의 전쟁 서사였다면, 전쟁이 끝난 것으로 만화도 끝이 나야한다. 하지만 <앨런의 전쟁>은 '앨런'의 이야기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앨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풍부해 진다. 주둔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풍부한 것이다. 플젠 교외의 마을에 주둔했을 때는 정원을 구경하다 그곳에 있는 손빨래를 하는 여인과 만난다. 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그 여인이 사실 피아니스트였고, 지금은 빨래를 해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앳된 소년은 전장에서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 싸움을 통해 전사로 단련되기보다는 군인이지만 인간으로 자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교류한다. 프랑스에서 체코, 독일, 다시 미국에서 프랑스로. 전쟁이 끝난 뒤 앨런은 여전히 전쟁의 연장선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도 나이를 먹는다.
<앨런의 전쟁>. 전쟁에 나간 앨런과 앨런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는 스펙터클은 없지만 대신 진지한 한 인간 그리고 그가 만난 다른 인간에 대한 기억이 있다.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전쟁이란 거대한 스펙터클보다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작가가 선보인 잉크워싱 기법과 비슷하다. 잉크워싱 기법은 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잉크를 떨어트려 번지게 만드는 표현 기법이다. 비록 <앨런의 전쟁>에 노골적인 전쟁의 스펙터클은 없지만, 전쟁은 미리 그려놓은 물처럼 인간의 모습을 제어한다.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 <앨런의 전쟁> 중. ⓒ휴머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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