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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님, 다음 영화는 여기서 찍으면 어때요?

[빌딩 블로그] 보이지 않는, 또는 만들어지지 않은 도시들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변종 생명체의 등장을 내세워 개봉 훨씬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흥행에 성공했다. 괴물은 영화의 제목이 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나. 티저 광고는 이토록 중요한 배역의 주둥이, 발목, 꼬리의 일부만 감질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괴물의 생김이 궁금해 죽겠어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괴물과의 첫 대면에서 소리 없는 탄성을 연발한다.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괴물이 전부는 아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웬만한 괴물들이 맨해튼의 스카이스크래퍼를 기어 올라가고 타임스퀘어를 때려 부술 때 봉준호의 괴물은 고요한 한강 수면 위를 헤엄쳐 다니고 때로는 잠실대교 교각에 매달려 망중한을 즐기기도 한다. 특히 영화의 중요한 배경인 한강에 연결된 하수 관로의 거대하고 어두운 공간 어딘가에 둥지를 틀어놓고 고수부지를 산책하는 사람들을 먹이로 잡아 나른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도 아닌 것이 한강에서 나고 자라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숨어 지낸다는 설정. 이 장소 설정으로부터 한강은 일상의 공간이 아닌 판타지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 영화 <괴물>의 한 장면.

원효대교 남단이었나? 괴물에게 납치된 딸 현서를 찾아 하수관로의 어둡고 거대한 열주 사이를 들어서는 장면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숨겨진 인프라를 한국적 블록버스터의 프레임으로 드러내는 기념비적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개봉 전부터 괴물 CG의 완성도가 얼마나 높을까가 연일 뉴스거리였지만 그보다 궁금했던 것이 괴물이 숨어사는 한강 어딘가의 은밀한 공간이었다. 지하 도시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직접 탐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그 곳을 시원한 극장에 앉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건축가들, 아니 적어도 나에게 영화 괴물은 한강과 서울의 인프라 스트럭처로 각인되어있다..

▲ <빌딩 블로그>(제프 마노 지음, 김아연·이혜인·허대영 옮김, 나무도시 펴냄). ⓒ나무도시
<빌딩 블로그>(김아연·이혜인·허대영 옮김, 나무도시 펴냄)의 저자 제프 마노는 봉준호의 <괴물>을 보지 못한 게 틀림없다. 봤다면 분명히 감독을 인터뷰하려고 했을 테니까.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거대한 도시 중 하나인 서울의 하수 시스템을 보여주려는 감독을 제프 마노가 가만 두었을 리 없다. 봉준호를 빌어 제프 마노의 관심사를 설명하자면 그러하다.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제프 마노는 도시 혹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들, 눈에 보이지 않아 신비롭고 흥미로운 '빌딩'들에 관심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제프 마노의 관심사(건축과 도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도시의 아래에(지하 세계)있어서이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5장 '미래의 경관') 채 상상 속에만 있기 때문이고, 너무 높이 있어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대상(3장 '하늘을 다시 디자인 하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소리(4장 '음악, 소리, 소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빌딩 블로그'(☞바로 가기)의 기록을 다섯 가지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재구성한 책 <빌딩 블로그>에는 수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빌딩', '빌딩 아닌 빌딩'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빌딩 아닌 빌딩'? 예를 들면 스팸 메일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지는 가상의 그래픽 같은 것들이다. 좀 싱거운가? 하긴 디지털 컴퓨테이션(computation)의 '잉여력'으로 만들어진 정키(junky)한 그래픽 따위를 빌딩이라 말하기엔 뭔가 석연찮다.

그렇다면 마약 밀매업자들이 단속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지하에 건설한 터널은 어떠한가? 혹은 알프스 산맥의 융기와 과도한 도시 열섬 현상을 활용하여 날씨를 만들어내는 구조물은?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져 현대의 런던을 지탱하고 있는 지하 수로와 길이 800킬로미터에 이르는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터널 정도면 빌딩이라 할 수 있을까? 다국적 석유기업인 쉘(shell)이 로키 산맥의 중앙부 아래 자사가 보유한 석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두께 10미터의 결빙벽(the freeze wall)과 이 벽으로 둘러쳐진 가로 세로 100미터, 깊이 500미터의 방은 어떨까? 아마 봉준호 감독이 미국에 살았다면 영화 <괴물>의 서식처로 찜 했을 법한 공간임은 확실하다.

▲ 런던의 리버 플릿(River Fleet). ⓒSamuel Seed/Dsankt. (sleepycity.net)

하지만 이들을 빌딩 혹은 건축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비일상적이다. 그렇다고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 쭉 따라 읽다 보면 알겠지만 제프 마노가 풀어놓는 빌딩 이야기의 소재는 75억년 후 지구의 경관(미래의 경관)까지를 포함한다. 이를테면 지금보다 250배나 뜨거운 태양의 활동으로 인해 대륙의 지각 운동이 활성화된 시점에서 "맨해튼이 런던의 항만과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도시의 경관"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결국 빌딩은 건축을 넘어 물리적 구조를 상상하고 구축할 수 있는 혹은 구축 될 수 있는 건조 환경의 모든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과 존재 하지 않는 것, 사람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들어낸 것 모두를 포함한다. 제프 마노에게 빌딩은 건축보다 하위 개념이면서 건축을 넘어서는 '행위' 혹은 '동적인 상태'(build-ing)이다. 역자들의 말을 빌자면 "빌딩<건축<빌딩이라는 새로운 부등식을 성립"시키면서 "지구상에 인간이 서식하는 방법을 새롭게 상상하는 수단"으로서 건축을 확장하여 재정의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빌딩'일까? "2006년 봄 자바 섬에서 이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폭발로 분출된 진흙이 지표면 어딘가로부터 이동하여 지표면 위를 흘러 내려갔고 진흙과 지표면 사이에는 거대한 빈 공간이 형성되었다. 이 때 이 빈 공간에는 구멍을 뚫어 콘크리트를 주입할 수 있고, 지표면으로 흐른 진흙은 콘크리트로 채워진 공간의 뚜껑이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새로운 인공지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제프 마노에게는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공극에 콘크리트를 채워 넣어 새로운 지형을 만드는 것도 '빌딩'이다. 더 재미있는 점은 이 화산 분출의 비상 대책을 보도하는 <가디언>의 기사를 보면서 1978년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등장하는 그리팔코니의 벌레 먹은 탁자의 구멍에 경화재를 주입하는 상상을 하고 계단실을 석고로 본떠낸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조각을 연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오지랖 넓은 연상 작용은 동굴처럼 연결된 "인도네시아의 진흙 구멍에 콘크리트를 채워 100년 후 지질학자들이 발굴해 내는" 신개념의 길고 거대한 대지 미술을 상상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일상과 예술, 도시의 기반시설, 자연재해, 과학과 심리, 건축기술의 공통분모를 연결시키며 <빌딩 블로그> 전체를 관통하는 제프 마노 식의 연상이다.

이쯤 되면 아마 독자들은 책을 덮고 무한한 시공간 이야기의 원천이 되는 '빌딩 블로그' 사이트로 방문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처음 방문하는 독자라면 아마 십 수 미터 정도 느낌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듯한 스크롤의 압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빌딩 블로그를 시작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월별로 정리된 아카이브에는 거의 매일 한 편씩의 글이 포스팅 되어있기 때문이다. 거의 일기에 가까운 글쓰기이면서 놀라운 지구력과 집중력을 보여주는 글쓰기이다. 블로깅이라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 역시 제프 마노의 글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이다.

<빌딩 블로그>는 확장된 개념의 빌딩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건축의 개념을 확장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현상과 이를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이론가, 아티스트의 인터뷰도 포함한다. "학문적 엄숙함을 던져버리자", "무엇보다도 당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을 탐구하라는 말로 시작하는 책이 뒤에 가면 <뉴레프트 리뷰>의 편집자이자 저명한 도시 이론가인 마이크 데이비스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세계 도시화의 동역학을" 논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빌딩 블로그>는 단순한 파워 블로거 또는 '오덕'의 혐의를 벗어 던지며,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와 건축 환경에 대한 진지한 탐구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기이한 현상에 대한 편집증적인 수집을 넘어서 거대한 세계에 파편처럼 흩어진 징후들을 선별하고 수집하고 나열함으로써 열린 체계의 담론을 구성해내려는 시도이다. 스스로 명시하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대상은 글쓰기에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리적인 구축의 논리로 읽어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들을 구축의 원인으로 이해하는 제프 마노의 고집은 어찌 보면 인간의 힘으로 새롭고 완벽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서구의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의 이상과 닮아있다. 주지하듯 서구의 모더니티는 역사와의 단절을 핵심적인 행동강령으로 하고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자연을 인간의 정복대상으로만 간주한다. 제프 마노가 건축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 점에서 <빌딩 블로그>가 구성해놓은 건축적 담론은 분명 비판적 반론의 여지를 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방위적인 수집과 집요한 글쓰기의 형식은 건축적 비평 담론의 다양성이 마련되지 않은 한국 건축계의 토양에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읽는 내내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경쾌한 질주가 떠오른다. "선택하라." "흥미를 자극하는 것을."

▲ 뉴욕 브루클린 지하 도시 터널 3호. 스탠리 그린버그의 <상수도: 뉴욕의 감춰진 수 체계를 따라가는 사진 여행>(2003) 중에서. ⓒGitterma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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