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서술자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흥미롭지 않다. 대신 이 '우리'의 사용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효과를 만드는가에 관심을 두자.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어가는 일은 이 '우리'에 자신을 어떻게 연루시킬지를 판단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서술자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소설 자체에 대한 태도를 정하게 된다. 이때 스스로 자리매김한 위치에서 '독자인 나'는 두 겹의 '거리'를 확인한다.
▲ <가벼운 나날>(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
다시, <가벼운 나날>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 소설은 '우리'라고 누군가를 호명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은 <가벼운 나날>을 읽어갈 준비가 일단은 된 셈이다. 특별한 강조도 없이, 힘을 주지도 않고, '불쑥'이나 '느닷없이' 같은 수식어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자연스럽게, 이 '우리'로 시작한 소설은 서두르지 않는다. 가볍게 이 '우리'를 던져둔 채 두 쪽 정도 서술을 이어간다. 그러다 '우리'는 (잠깐, 당신은 이제 이 '우리'에 대한 태도를 정했는가?) 강가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선다.
"우리는 정원을 걸으며 작고 쌉쌀한 사과를 먹었다."(25쪽) 소설은 이제 '독자인 나'의 태도를 잠정적으로라도 선택할 시간이 왔다고 알린다. 당신은 이 '우리'에 속해서 정원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저만치 물러서서 정원을 걷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가. 소설은 여기서 '독자인 나'의 선택을 조금 더 끌어낸다. 누군가의 정원에 '위치'하고 있다는 상상뿐만 아니라, 그 정원에서 사과를 먹는다는 '행위'의 상상까지를 요구한다. 그러니까 '독자인 나'는 이 소설에 자신의 위치와 시선과 행위를 어느 정도로 연루시킬지를 묻고 있는 셈이다.
이런 선택을 주문하자마자, 바로, 소설은 '새롭게' 시작한다. 1인칭 복수에서 출발한 소설은 3인칭의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물러선다. 여기서 이 시선의 교차가 여러 겹의 거리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기억하자. 작중 인물이 "차에서 내린 사람"(25쪽)이라고 처음 소개될 때, 여기에는 정원에서 사과를 먹으며 이 상황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과 '우리'가 3인칭으로 사라지는 시선이 겹쳐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독자가 읽는 대로다. 소설은 비리와 네드라의 삶을, 그들 주위 인물들의 삶을 특유의 시선과 태도로 드러낸다. 물론 소설은 처음 건넸던 연루에의 권유를 얌전하고 깨끗하게 그만두지 않는다. 채 다섯 쪽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우리'로 연루/분리시켰던 목소리에서 다시 '우리 안의 나'라는 주된 목소리 하나를 불러낸다. 연루 안의 구분을 통해, '독자인 나'의 위치와 시선과 거리를 잊지 말라고, 늘 자신의 위치와 시선과 거리를 가늠하라고 요구한다. "나는 그녀의 생활을 안에서 밖으로, 그 중심에서부터 묘사할 예정이다."(29쪽)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시작한 이유가 있다. <어젯밤>(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펴냄)으로 설터를 만난 독자라면, 아마도 이번에 출간된 <가벼운 나날>을 무척 기대했을 것이다. 소설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킨다. (독자로서 나는 굳이 둘 중 고르라면 <어젯밤>을 앞세우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의 매력이 기본 서사나 주제에서 오는 것 같지는 않다. 극적인 드라마나 선명한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이 소설은 서사가 두드러질 때보다, 별스런 사건도 없고 자극적인 묘사도 없는 서술에서 오히려 생기가 돈다. 이런 묘한 매력은 <거리>에 대한 소설의 서술 태도에서 발생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생활을 안에서 밖으로, 그 중심에서부터 묘사할 예정이다." 독자인 당신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당신이 읽은 내용이 서술자가 분명히 말한 대로 그녀의 생활을 "중심에서부터 묘사"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그녀의 "중심"에 대해 뭔가 아쉽고 궁금한 것이 남았다면, 서술자인 '나'는 자신의 다짐을 실행하는 데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서술자의 이런 노출과 개입 자체가 하나의 소설적 농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당신이 지켜본 그녀의 삶이 정말 "중심에서부터 묘사"된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이 독자인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일상의 중심과는 다를 뿐.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앞에서 얘기한 '겹의 거리'를 떠올려보자. 독자인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고 기대했는지 모른다. 중심은 가깝게, 깊게, 세밀하게, 치열하게 다뤄야 제대로인 것이라고. 하지만 중심을 멀리서, 얕게, 스치듯이, 연하게 다루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반대로 주변을 진하게, 밀도 있게, 무겁게 다루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문제는 이렇다. 소설의 성패는 서술자가 자신의 시선과 거리를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일관되게'는 늘 '동일하고 단일한' 시선과 거리를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서술자가 자신이 다루는 인물과 사건에 어떤 시선과 거리를 유지하는지 늘 성찰적으로 환기한다는 말이다. <가벼운 나날>은 서술자가 말한 "중심에서부터 묘사"한다는 과제를 어떤 시선과 거리를 유지한 채로 끝까지 '일관되게' 실행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의 거리-공간에서, 독자인 우리는 이제 자신이 어떤 시선과 거리로 인물과 사건을 만났는지 깨닫게 된다.
<가벼운 나날>은 '거리'에 대한 태도 유지라는 과제를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해낸다. 기본 서사가 그나마 두드러지는 부분을 제외하면, 소설이 어떻게 스스로를 끌어가는지 살펴보라.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먼저, 스냅사진이라고 부를만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여기엔 때로 짤막한 캡션이 달리기도 한다. 이런 스냅사진들이 나열된다. 독자가 읽어가면서 이 스냅사진들은 슬라이드 쇼가 된다. 신기하게도 이런 단속적인 이미지들의 이어짐에서 '움직임'이 발생한다. 그렇게 소설은 앞으로 나아간다. 스냅사진의 이어짐과 무심한 활동사진의 연쇄결합. 느긋하게 다가갔다가 물러서고, 전체적으로는 장기 노출된 채 적절한 거리 탐색에 애쓰는 카메라의 시선. (이런 효과가 원서에서는 설터 특유의 무종지문과 분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번역문에서는 주로 단문과 리듬으로 이런 효과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이 있다. 이들 스냅사진의 이어짐과 거기서 발생하는 '움직임'은 놀랄만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식사를 하는 이 공간에서, 특별한 연결 장치 없이, 불륜이 벌어지는 저 공간으로, 다시 별다른 설명 없이, 대화를 나누는 그 공간으로, 스냅사진들이 이어지는 데에도 서술은 크게 덜컹거리지 않는다. 이런 이어짐과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어떤 거리'는 공들여 상상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결코 누구도 '바로 여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영영 흐릿하고 모호하다는 이유에서만 적절한,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의 위치를 미세조정하게 만드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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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벼운 나날>은 먼저 소개된 <어젯밤>보다 독자의 호오의 폭이 클 것 같다. 독자인 우리가 이 소설을 통과한 후 절감, 동감, 공감, 이해, 연민, 냉소 가운데 어느 자리에 머물렀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자신이 머문 자리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일이다. 이 소설에서 매력을 느낀 독자이든 아니든, 설터가 애써 유지하고 만들어낸 '거리'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독자의 한 명으로서 나는 주로 '이해'의 자리에 머물렀다. 이 소설에 깊이 '절감'하거나 완전히 '동감'하는 감수성을 지녔다면, 이 시대 한국에서 살아가기에는 조금 어렵고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짧은 글에서는 <가벼운 나날>의 서사나 주제에 대해서 별스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럴 만큼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이 "결혼의 예비학교"로 작동한지 수백 년이 되었고, 쿠르트 투홀스키의 시구처럼 "결혼의 대부분은 권태로 데워진 우유"라는 것을 이제 알만큼 알지 않은가. 서사와 주제에 집중하면 여러 비판들이 가능하다. 플롯은 독자의 기대와 기다림을 끝내 배반한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소설의 시야가 너무 협소하다 등등. 하지만 이런 비판들을 전제해도, 서사와 주제를 건너뛰면서 소설에 빠져들게 만드는 빛나는 스타일이 있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선을 넘지 않지만 친밀한, 느긋하게 물러나 어루만지는, 절제를 통해 단아한, 그런 태도가 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진실도 필요하지만, 더 다양한 태도도 필요하다. <가벼운 나날>의 태도는 드물고도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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