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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소중하지만, 냉장고에 대한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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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는 소중하지만, 냉장고에 대한 책은?

[내가 옮긴 책]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암>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얼마 전 동창 모임에서 오갔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예전에는 청문회 같은 곳에 나온 인사들이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저 발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우리 자신이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바로 그렇다. 몇 년 전 일은커녕, 어제 점심 때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곤 하니 말이다.

공교롭게 이 원고 의뢰도 나 자신의 머릿속을 청문회 분위기로 몰아간다. "지금까지 작업하셨던 책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사랑하는/애먹였던/시험에 빠트렸던"이라니! 

"흠, 이 책은 어땠지요?"
"글쎄요…너무 오래 전에 했던 책이라서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러면 이 두꺼운 책은요?"
"잘 모르겠는데…시간이 좀 걸렸겠네요."
"이 어려운 책은요?"
"어라, 내가 이런 책도 했었나요?"
"이 내용은 어때요?"
"그게 내 문체였어요? 왜 전혀 기억이 안 날까요?"
"그럼 이건? 두 달 전에 나온 책인데요?"
"두 달 전이었어요? 왜 몇 년 전에 한 듯한 느낌이 들지요?"

▲ <암>(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글방 펴냄). ⓒ까치글방
마치 뇌가 매번 판을 쓸어버리고 새 판을 까는 것 같다. 당신의 뇌 용량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으니, 이미 끝낸 책은 다 잊고 지금 하고 있는 책에만 몰두하라는 듯하다. 이런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주변의 경력이 꽤 된 번역자들에게도 다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종종 이런저런 요청을 하신다. 우리가 이런 내용으로 다큐멘터리나 강연회 등등을 예정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몇 년 전에 이런 책을 번역하셨으니 도움을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전화나 전자우편을 받는 순간,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이쯤 했으니, 필자는 독자분들께서 위에 인용한 의뢰 문구 중에서 "지금까지"라는 단어를 "최근에"로 바꾼다고 해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만으로도 필자의 뇌는 꽤 혹사당해야 한다. 이럴 때마다 뇌에 통각 수용체가 없다는 점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고 의뢰를 받는 순간, 최근에 옮긴 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바로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이한음 옮김, 까치글방 펴냄)다. 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수 없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바로 감정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밴 기억이 가장 잘 떠오른다고 뇌 과학이 말하지 않던가.

필자가 번역하는 책이 주로 과학책이다 보니, 지적 깨달음을 통한 감동은 이따금 느낄 수 있지만—오랜 세월 이 일을 하다 보니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이 늘어서 그런 감동을 느끼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는 하다—정서적인 갈증까지 충족시키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과학이 본래 이성을 중시하니, 당연한 일이다. 유레카를 외치면서 벌거벗고 거리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에게서 지적 깨달음이 아닌, 창피함이나 돌조각을 맨발로 밟을 때의 아픔을 엿보려 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우리의 감정은 그쪽으로 주의를 돌리려 하겠지만, 그것은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책을 통해서는 이성과 감정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이따금 접할 수 있다. <암>이 그러했다. 이 책은 암에 걸린 환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순간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알아차린 환자의 충격과 허망함, 그를 바라보는 의사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죽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간결하게 함축적으로 암이 주는 고통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으면서, 저자는 암의 역사와 암을 이기기 위해 사투를 벌여온 환자, 의사, 과학자의 모습을 상세히 들려준다. 어린이 암 환자들이 가득한 병동에서 커튼이 내려졌다가 얼마 뒤에 올라가면, 모두가 사라지고 빈 병실만 남는다는 등 가슴을 에는 이야기와 과학적 내용을 절묘하게 섞은 걸작이다. 번역이 정신을 집중하여 하는 일인지라, 이렇게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덧붙이자면, 이렇게 감정과 이성을 잘 버무린 책이 반드시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이 감정을 잘 섞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이지, 다른 유형의 책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책은 저마다 개성이 있고, 그 안에서 나름의 세계를 펼친다. 다만 다른 과학책들이 펼치는 유사한 세계들—합리적인 세계들—만을 죽 보다가, 새로운 책이 주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서 더 감명을 받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사실주의 그림을 죽 보다가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았을 때 받는 충격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번역에도 일종의 원판 불변의 법칙이 작용한다. 직역을 하든 의역을 하든 원서에 얽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서의 문체가 건조하고 내용이 무미건조하다면, 번역할 때 아무리 생동감을 부여하려고 애쓴다 한들, 끝내고 나면 건조함이라는 전체 틀 안에서 조금 아등바등하는 수준에 불과했음을 깨닫곤 한다. 반면에 원서의 문체가 힘이 있고 내용이 긴박감을 부추긴다면, 번역도 저절로 그 분위기를 따라간다. 그 점에서는 소설책을 번역하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랬기에 <암>에 실린 짤막한 감동적인 실화들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밋밋하게 끌고 가든 과학자 같은 인물의 개인사를 섞어서 분위기를 조절하든 간에, 과학책은 본질적으로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니 지면의 압박을 받을 때,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을 덜어낼 수밖에 없다. 지식을 덜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책들을 오래 번역하다 보니, 어쩌다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옮기는 부분이 나오면 왠지 뇌가 기대감에 흥분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암>에 실린 이야기들이 그러했다.

이 책이 인상에 남은 또 한 가지 이유는 내 지레짐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왜, 어떤 일이든 오래 하면, 그냥 슬쩍 보기만 해도 다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노련한 형사가 얼굴만 보고도 죄가 있는지를 짐작하고, 숙련된 정비사가 엔진 소리만 듣고도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래된 번역자는 표지와 차례만 보고서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런 짐작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암>도 그러했다.

암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생물학 쪽으로 틀이 잡힌 내 뇌는 암의 전반적인 정의에서 시작하여 유전자와 암의 발생 메커니즘을 다루었겠지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그 지레짐작은 여지없이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책은 의사의 관점에서 암의 정체를 파악하고 암과 맞서 싸워 온 사람들의 관점에서 암을 다룬 이야기였다. 내 지레짐작이 옳았다면 이 책은 암의 발생 기구를 분자생물학적으로 분석하는 아주 어려운 내용이 될 뻔했다. 하지만 대신에 이 책은 인간의 고통과 극복하려는 노력을 다루는 쪽을 택했다. 암을 이겨내자는 흔한 실용서들과도 다른 과학적 관점을 취하면서 말이다. 그런 점들을 볼 때 더욱더 잘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 <기술의 충격>(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랬기에 이 책의 판매 부수를 볼 때면 좀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현실 자체가 더 압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분야를 다룬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으레 처하게 되는 운명을 따르는 모양새다. 냉장고를 예로 들어보자. 냉장고는 어느 집에나 있고 누구나 쓰는 장치다. 냉장고에는 설명서가 따라오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나 새로운 기능을 써야 할 일이 생겼을 때만 들여다볼 뿐이다. 냉장고가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장치라는 데 착안하여, 냉장고의 역사와 내부 구조와 거기에 관련된 과학기술의 발전을 다룬 책을 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살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냉장고라는 장치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냉장고의 역사와 과학 따위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양쪽의 비율을 따지면 99.9퍼센트 대 0.1퍼센트라고나 할까? 스마트폰은 아직 새로운 기기이니, 그 비율이 95퍼센트 대 5퍼센트쯤 될 것이다. 암은? 아마도 냉장고 쪽일 것이다. 암이라는 현실 자체가 중요하지, 암의 역사와 과학에까지 관심을 둘 사람은 거의 없다. 암에 걸리지 않은 이는 걸리지 않았기에 아예 암을 도외시하고, 암에 걸린 환자와 가족은 암의 치료에만 몰두하게 마련이니까.

안타깝게도 그래서 우리의 현실과 지식 사이에는 많은 공백이 생긴다. 일상생활과 과학은 점점 더 따로 놀게 된다. 이렇게 말하니, 또 하나의 책이 불현 듯 떠오른다.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민음사 펴냄)이다. 이 책도 번역을 맡았을 때 아주 반가웠다. 현실과 과학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찾는 독자가 적어서 좀 우울했다. 기술은 우리에게 이제 냉장고가 되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뇌의 기억력이 한계에 이르러서, 예전에 했던 책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암>과 <기술의 충격>의 저자 이름도 생각이 안 나서 찾아봐야 했다. 그러니 아쉬움과 울적함도 오래 갈 리가 없다. 이렇게 굳이 되새기도록 글을 쓰게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역자 후기

우리에게 암은 무엇일까?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암으로 죽는다. 살기가 좋아지고 수명이 늘수록 암은 오히려 늘어난다. 인구의 4분의 1이 생애에 암에 걸린다는 통계 수치는 어느새 옛말이 되었고, 인구의 3분의 1을 넘어 머지않아 절반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예측도 나와 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화학물질, 방사선 등 암을 유발하는 물질은 늘어나며, 우리는 오래 살수록 발암물질에 더욱 노출된다. 의학의 발전도 오히려 암에 걸린 사람의 비율을 더 늘리는 듯이 보이곤 한다. 암 치료를 받았지만 암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제든 재발할지 모를 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과연 암은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암을 정복할 수 있을까?

종양학자인 저자는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점점 더 이 의문에 빠져든다. 암 자체와 암 치료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자신도 헤어날 수 없이 점점 더 암의 손아귀에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자는 암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애쓴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때로는 자신이 직접 치료한 암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때로는 암과 맞서 싸우는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또 때로는 암 자체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문을 계속 붙들고 나아간다.

암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저자는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문헌을 샅샅이 훑고, 고대 인류의 유골도 살펴본다. 암은 언제부터 인류와 함께 했을까? 현대인은 암이 현대의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방사능, 석면, 담배, 화학물질처럼 암을 일으키는 요인들이 현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암이 오래되었다고, 인류의 여명기부터 우리와 함께 있던 질병이라고 말해준다. 그저 다른 질병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천연두, 결핵 등 대량으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갔던 다른 질병들이 보건 위생과 의학으로 수그러든 뒤에야 암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인류는 줄곧 암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암을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암 환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마침내 암이 주목해야 할 병이 되었을 때, 인류는 암을 과소평가했다. 페니실린 같은 약물이나 백신, 위생 시설 향상 등으로 많은 질병을 물리쳤듯이, 암도 쉽사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시드니 파버, 메리 래스커를 비롯하여 암에 선구적으로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암에 맞서 불굴의 싸움을 벌였다. 열정과 헌신을 통해 그들은 암을 물리치고 암 환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암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랬기에 암을 과소평가했다. 그랬기에 암이 곧 정복될 것이라고, 그저 국가가 암 퇴치를 위해 예산과 인력을 모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저자는 그런 열정적인 인물들이 거둔 일시적인 성공과 뒤이은 좌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와 더불어 고통스러운 암에서 벗어났다고 기뻐하다가 다시 암에 굴복한 환자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과정을 성공이냐 실패냐라는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다. 환자, 의사, 과학자, 활동가 등 암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그 힘겨운 투쟁이 암을 서서히 알아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맞서 싸울 때마다 암은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겼다 싶으면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역공을 가한다. 그런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인류는 암이 오랜 역사를 지닌 존재답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습과 행동을 지니고 있음을 서서히 깨달아 왔다.

암을 알아가는 이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언제쯤 끝날지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지는 싸움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암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화학요법을 권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 치료가 끝날 때까지 환자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자는 치료가 끝나고 5년이 지날 때까지 살아남는다. 환자의 집을 찾아가 축하의 꽃다발을 건네주면서, 저자는 암의 역사가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연구자들은 암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기는지, 각각의 암을 공략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등 많은 것을 알아냈다. 글리벡처럼 특정한 암을 콕 찍어서 공격하는 새로운 암 치료약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암은 본래 정복할 수 없는 질병이었다. 이제는 정복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질병이 되어가고 있다.

저자는 암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암이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아라고 말한다. 오래 살고 싶어하고 자신을 쏙 빼닮은 자손을 낳고 늘리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일그러진 형태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존재라고 말이다. 암을 없애려면 우리 자신을 없애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암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암을 알아갈수록 우리가 암을 대하는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암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책은 암 이야기이지만 암 환자나 암 의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암이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거울상이기에, 우리 모두가 암의 진정한 모습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서 말이다.

역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차례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저자는 군데군데 자신이 환자를 치료할 때의 일화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 상황과 자신의 감정을 섞어서 짧게 적고 있다. 하지만 그 짧은 대목들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백 마디 말보다도 나은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암을 다루니까 발암유전자와 DNA의 돌연변이 이야기가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다. 최근의 생물학 책은 으레 그러하니까. 하지만 이 책에 그런 내용은 부수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저자는 암을 직접 대하는 사람들, 즉 의사, 환자, 과학자, 활동가, 가족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이 책은 쉽게 읽히며,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울컥하게 만들며 감정을 뒤흔든다. 의학 및 과학 지식과 인간미를 잘 조화시킨 멋진 책이다. 암을 다룬 최고의 교양서라고 할 만하다.

이한음의 주요 저서 및 역서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이한음 지음, 밀레니엄북스 펴냄)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영사 펴냄)
<위대한 생존자들>(리처드 포티 지음, 까치글방 펴냄)
<공생자 행성>(린 마굴리스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마음의 과학>(스티븐 핑커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와이즈베리 펴냄)
<암>(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까치글방 펴냄)
<앵그리 플래닛>(레스터 브라운 지음, 도요새 펴냄)


<거의 모든 것의 미래>(데이비드 오렐 지음, 리더스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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