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이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역사를 수정하려는 일부 극우집단들의 시도들을 제외하고는 공적 토론의 중심적 주제가 된 적이 없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파괴와 사상자들을 낳은 독일인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범죄를 상대화하고 심지어 옹호한다는 오해를 빚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1997년이면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국제 사회로부터 완전한 권리를 지닌 국가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나치 범죄의 그늘로부터 비로소 제대로 벗어나는 듯하던 시기였으니, 제2차 세계 대전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이 반갑게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 <공중전과 문학>(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어쨌든 그의 이 강연들은 즉각 독일 문학계에서 큰 반향을 낳았고, 이후 독일 주요 언론의 문예란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독일에 가해진 폭격에 대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2년에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시작된 독일에 대한 지역폭격(Area Bombing)은 독일의 주요 대도시들에 대한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도시 주민들을 살상하고 건물들을 파괴함으로써 독일의 사기를 꺾고 산업생산력을 약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엄청난 물량의 군수물자가 동원되어 당시 영국의 군수물자 3분의 1이 투입되었다.
쾰른, 뤼벡, 에쎈, 레겐스부르크, 함부르크, 뉘른베르크, 할버슈타트, 다름슈타트, 베를린 등 무수한 독일 도시들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이 폭격으로 지상의 독일인 60만 명이, 그리고 공격에 나섰던 영국 공군의 60퍼센트에 달하는 10만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공격은 전투지역이 아닌 후방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고, 실제 효과도 확인될 수 없는 정도로 미미하여 정당화될 수 없었다. 생존자들도 부상을 입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다.
제발트는 이 공격이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한 합리적 행동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이 다른 대응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실행한 궁여지책이었다고 판단한다.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을 살상한 이 공격은 조금의 정당한 근거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폭격의 실제 효과가 미미함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전가치 때문에, 그리고 극대하게 생산된 군수물자를 소비할 필요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수들 또한 지상의 목숨들보다 폭탄의 경제적 가치를 더 우선시했다고 비판한다. <공중전과 문학>(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제발트가 인용하는 영국 폭격수의 발언은 이러하다.
"그렇게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폭탄을 생산했는데, 실질적으로 이것을 산이나 벌판에 던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93쪽)
멜랑콜리의 정조로 충만한 작품들을 써온 제발트였지만, 이 책에서 그는 폭격에 대해 분노의 시선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비이성적으로 마지막까지 무자비하게 실행"(28쪽)되었고, "그 어떤 이성에도 반하는"(33쪽) 공격이었으며, "무분별하게 추진된 파괴정책"(30쪽)이었다는 여러 표현들이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시선에서 볼 때, 독일인들이 이에 대해 전쟁 직후부터 줄곧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눈에 띄는 일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무자비한 공격을 당하여 집과 가족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이에 대해 거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전쟁 후에 이 공격은 전혀 공식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제발트의 관찰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침묵에서 불순한 의도를 간파해낸다.
▲ <토성의 고리>(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독일인들은 이렇게 과거를 지우면서 재건에 나섰고, 미래만 바라보며 경제 기적을 이루었다는 것이 제발트의 인식이다. 그러나 침묵에 대한 제발트의 판단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지점은 이 침묵이 독일의 죄악을 전체적으로 지워버리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방관하고 동조하고 지원했던 나치의 범죄를 대면하고 성찰하는 대신 이 범죄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지우려고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입은 부당한 피해들에 대해서도 함구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기 검열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폭격에 대해 말하는 것도 금기시되고 터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발트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치욕스런 가정사"(22쪽)를, "추문"(67쪽)을 지우는 것과 같았다.
이는 독일인들은 나치의 범죄가 치욕적인 역사라는 것을, 그리고 폭격이 이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말이지만, 이에 대해 철저한 반성이 아니라 망각으로 대응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망각으로 대응할 때, 파괴의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제발트는 독일의 경제 기적에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배운 효율성이 한 몫 했음을 지적하면서 독일이 유럽 연합의 실질적인 추동세력이 되고 국제적인 대국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과거에 대한 망각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가 공중전의 문제를 새삼 제기하고 나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중전과 문학>의 주요한 또 한 가지의 내용은 독일 문학이 이런 침묵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독일 문인들은 폭격 후에 도시들의 상황에 대한 묘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하인히리 뵐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는 했지만 문단은 이를 주목하지 않거나 배제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폭격을 다룬 문학작품들조차도 현실의 직접성, 진실성을 전달하는 대신 현실을 신화화하거나 형이상학적으로 고양시켜 초월함으로써, 혹은 미학적 세공에 몰두함으로써 파괴와 죄의 문제를 직접 대면하는 일을 회피했다고 한다. 끔찍한 고통 앞에서 문학은 소박한 사실성과 진실성에 주력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 진리의 이상은 파괴에 직면하여 문학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근거"이며, 이와 반대로 "초토화된 세계의 폐허로부터 미학적이거나 유사 미학적인 효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이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박탈하는 처사이다."(76~77쪽)
따라서 독일 문학은 미적 장치나 철학적 고양에 집착하는 대신 순수한 기록성의 미덕을 살려야 했으며, 파괴에 대한 이런 기록들 앞에서는 "그 어떤 픽션도 (…) 빛이 바래는"(86쪽) 법이라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제발트는 "나는 일체의 값싼 허구화의 형태들을 끔찍하게 혐오한다. 나의 매체는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가 인간의 역사 전체를 고통과 파괴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런 고통과 파괴의 지속성은 이것이 우연이나 인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는 것이 제발트의 인식이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가 된다. 자신의 역사를 자연사와 분리된 "자주적인 역사"(94쪽)로 자부해온 인간은 자신의 자연성을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등장하는 천사를,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폭풍'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진보는 제발트가 말하는 자연사의 일부다. 인간에 대한 이 깊은 회의는 자주적인 역사의 불가능성을 예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할수록 자주적인 역사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 제발트의 인식이며, 그가 작품과 에세이들을 쓰고 이런 강연을 한 이유 역시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이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 <손님>(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근본적으로 죄악은 더 큰 죄악을 구실로 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영국군의 공중전이 그러했고, 한국전에서의 미국의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이 그러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도 마찬가지다. 이런 '피해자의 죄악'에 대한 작품으로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와 황석영의 <손님>(창비 펴냄), 노사카 아키유키의 <반딧불이의 무덤>(다카하타 이사오 그림, 서혜영 옮김, 다우출판사 펴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의 아베 총리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희생자 위령식에서 각료들의 신사 참배를 사실상 허용하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고 있다.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독일인들의 침묵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제발트의 글과 아베의 몰역사적인 발언을 함께 놓고 보면 일본의 행세가 참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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