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여기 잉여 하나 추가요~" 그 다음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여기 잉여 하나 추가요~" 그 다음은?!

[프레시안 books] 최태섭의 <잉여 사회>

*
"당신에게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왜 그리 한가하게 앉아있는 것이오?" 어느 천치 같은 레크리에이션 강사(사람들은 그를 '멘토 선생님'이라 부른다)가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자주 패배했으나 후에 더 자주 찬양받게 된 록 가수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잊고는 언성을 높인다. "가장 한심한 청년들은 무기력하게 자포자기한 이들이오. 흐리멍덩한 저 눈빛들 좀 보시오!" 인간의 권리에 관심이 많다는 어느 운동가는 점잖게 나무란다. "당신은 참으로 욕심도 많구려. 전 세계 인구의 75퍼센트가 당신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왜 '청년다운 열정'을 품고 있지 못하냐며 호통을 치다가도, 이내 다른 한쪽에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등을 두드려 준다. 정작 당사자들은 어느 장단에 춤추며 박수를 쳐야 할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민 끝에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기로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듯이,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겸손한 태도를 내세우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리 없다. 어쩌다가 인생이 이렇게 된 걸까, 못내 서글픈 마음을 담아 텅 빈 공중에 외쳐본다. "내…내가 잉여라니!"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속인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분명 잉여란 어두운 구석에 아무렇게나 남겨진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터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이곳에는 잉여 아닌 자보다 잉여가 더 많아졌다. 청년들은 다시금 고민에 빠진다. 정말로 나는 잉여에 불과한 걸까? 아니, 잉여가 맞기는 한 걸까?

<잉여 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한 '잉여'의 대답이다. 저자의 소개에서 구태여 '청년'이라는 말을 뺀 까닭은, 이른바 '청년 논객'으로 활동하며 "그것을 구매해줄 어른들의 기호에 맞는 애매한 애늙은이"(36쪽)로 활동해온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세대 담론의 수혜와 폐해를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저자는 오늘날 '잉여'의 존재양식이 단순히 '청년들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진단에 도달한다. 그에 따르면, 잉여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진짜 잉여와 가짜 잉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과 경향에 대한 고민"(253쪽)을 해내는 일이며, 이는 "나 역시 그 흐름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256쪽) 자각과 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

▲ <잉여 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그가 주목한 '잉여'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신만만한 선언이 가능했던 것일까. 책의 1부에 걸쳐 제시되고 있는 실마리는 "자유로워지라!"는 현대의 정언명령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오늘날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에 더는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한때 이러한 해방은 근대 이후로 줄곧 꿈꿔왔던 '자유로운 개인'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적 과제의 소멸이란 곧 "나의 존재를 구제해줄"(76쪽) 힘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공황상태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자유를 갈구해온 외침들이 무색하리만큼, 자유의 정언명령은 어느 새 자본주의 사회의 숱한 발명품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에 가까운 작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데리다의 말처럼 이것은 일종의 영구기관으로서, 저 명령이 존재하는 한 자유는 그것이 달성됨과 동시에 자유에 대한 요구에 복종하는 구속이 되고 만다.

저자는 저 이중의 구속, 해방의 얼굴을 가장한 속박의 완성을 가리켜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얼굴을 한 삶'이라는 모습으로 돌아왔다"(59쪽)고 말한다. '인간의 얼굴'이 허락되지 않았던 1934년의 <레디메이드 인생>이 현실을 앞질러버린 '백수白手'의 탄식이었다면, 오늘날 <잉여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너도나도 자발적인 '레디메이드 인생'이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 음울한 역전의 풍경이야말로 '잉여'들을 만들어내는 조건과 환경이 된다. 즉 잉여란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만이 유일무이한 '제 1원리'가 되어버린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체제에 안착할 만한 자리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결핍을 필요조건으로,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슈퍼정규직워너비"가 되어가는 일련의 과잉을 충분조건으로 지니는 '구조적 산물'인 셈이다. 모순된 체제에 저항할 역사적 주체를 자처할 수 없으면서도, 그에 적극적으로 봉사할 인간-부품조차 될 수 없는 "근거 없는 존재들", 그들이 바로 '잉여'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대중을 겨냥한 저서답게, <잉여 사회>는 어려운 개념이나 복잡한 논리가 아닌 실제 현상들을 추적하며 잉여의 구조적 기원을 설명해 나간다. 하지만 그 서술방식의 친절함과는 별개로, 잉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소 세심한 독해가 필요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실 속 잉여에게는 근거가 없다지만, 잉여의 이면에는 분명 어떤 불가능성의 형태로 자리하는 근거의 계보들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훌륭하게 편입된 '엄친아'도, 그에 대한 저항으로써 스스로의 자리를 확보하는 '루저'도, 심지어 완전히 사회로부터 배제된 '몫 없는 자'조차도 될 수 없다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잉여를 만들어낸다는 진단은, 한국사회에서 잉여가 차지하는 위상이 '엄친아'에 대응되는 '자기 착취의 주체'(한병철), '루저'와 맞닿아있는 '속물snob'(코제브), 그리고 '몫 없는 자'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아감벤)가 그리는 삼각형의 내부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잉여 사회>에 대한 가장 손쉬우면서도 우려스러운 독해는, 이러한 배경들을 무시한 채 이 책을 단순히 세태적인 개념으로서의 '잉여'에 대한 추적과 진단으로 읽어내려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자칫 저자가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가능성"(27쪽)을 상투적인 맥락의 긍정 또는 관념론적 차원의 허무맹랑한 수사로 치부하게 됨으로써, <잉여 사회>를 또 하나의 '청년 기획 상품'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낳는다.

*
따라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책의 2부에 제시된 실제 사례들을 잉여를 둘러싼 삼각형에 각각 대입해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여기에 소개된 '잉여 생태계'의 모습은 모두가 사이버스페이스의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애초의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이해를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몇 안 남은 공유지 같은 역할을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다."(125쪽) 이 가상의 중간지대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을 분석함으로써, 저자는 좀비/유령이 되어버린 잉여들이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e-병맛 쩌는 세상"(127쪽)이라는 표현대로, '엄친아'가 될 수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잉여들의 몸부림은 당연히 왜곡되고 뒤틀린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실이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잉여 역시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다."(256쪽)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잉여 문화는 두 가지 특징적인 양상인 자조/자학의 방식과 공격성의 표출로 구체화되면서, 점차 그 가상의 우회로를 경유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한 주체로 올라서기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먼저 잉여 생태계의 가장 흔한 양상, 고자와 게이를 자처하는 자조와 자학의 방법은 스스로를 깎아내림으로써 '호모 사케르', 즉 지배적인 질서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체제를 강화하는 존재와의 동일시를 의도한다. 언뜻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역전의 노림수가 숨어있다.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정성과 공명함으로써, 잉여는 표면적인 자유의 획득과 더불어 사라진 저항의 역사를 되살려내고, 동시에 그 부정의 주체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내세우고자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기획은 오늘날의 잉여들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과거 '루저'들의 역설적인 성공을 다시금 점유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잉여라고 자칭하며 자조 놀이를 할 때에는 내가 정말 잉여일지도 모른다는 긴장으로부터 잠깐 해방을 맛볼 수는 있지만"(172쪽) 그것이 깨어지는 순간 현실의 압력은 다시금 강력하게 우리를 옥죄게 마련이다. 결국 정념적 자기반성의 태도는 타인의 비판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미리 차단할 수 있을 뿐, 결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무용하다.

한편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키보드워리어'와 '일베'의 방식은, 의도적으로 설정된 대상들과의 적대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의 입지를 보존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 현실에서 잉여들의 삶을 압박하는 불안은 "사이버공간을 떠돌며 존재하다가 어떤 벡터 혹은 좌표가 그들 앞에 주어지는 순간 하나의 '힘'으로 변한다."(202쪽) 이 '힘'을 무책임하게 휘두르는 행위를 통해 잉여들은 자신이 현실세계의 '부당한 평가'보다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쾌락"(197쪽)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강박적인 교양의 축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분명 타자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인정욕구를 벌충하려는 '속물적 태도snobbism'와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의 힘에 도취된 잉여들은 일찍이 코제브가 비판했던 스놉의 병폐를 정확히 동일하게 반복한다. 상대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시도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제 몸을 늪에서 끌어내려 했던 뮌히하우젠의 우스꽝스러움을 되풀이하는 데에 그치고 만다.

스스로 배제되거나 타인을 배제시킴으로써 체제에 편입되고자 하는 잉여의 기획들은, 이처럼 그 시작부터 이미 실패로 귀결될 운명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조와 자학, 공격성의 표출이라는 뒤틀린 기획들이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끝에서 잉여들이 도달하게 될 지점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 철저하게 매여 있는 '자기 착취의 삶'에 다름 아니다. <피로 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물화된 오늘날의 구조 안에서 완전한 승자란 존재할 수 없다. 못 가진 자 못지않게 모두 가진 자 또한 한낱 패배자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자기의 생을 더 많이 착취함으로써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냉엄한 현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진실을 말해준다: 이곳에 잉여 아닌 자는 없다.

*
"그때가 되면 지금 이 시대의 눈을 가리고 있는 억울함과 자의식을 잠시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비로소 타의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우리가 만날 때다. (…) 자신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결코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그 수많은 마찰과 파형들을 우리들의 새로운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바로 그 깨어짐 속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261쪽)

정말로 우리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일까? 물론 좌절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바로 이 극명한 실패의 지점으로부터 저자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시작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도 성공에 도달할 수 없고, 설사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면, 남은 길은 어차피 하나뿐이다. 지금의 우리들, 아니 잉여들에게 필요한 기획은 저 삼각형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 버티고 선 채 저 자장을 형성하는 꼭짓점들을 거꾸로 뒤집는 일이다.

<잉여 사회>가 사이버스페이스에 펼쳐진 잉여들의 생태계를 세밀하게 기록해두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잉여들에게 자신의 맨얼굴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배제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편입되지도 않는 자'라는 제 3의 가능성을 스스로 깨닫도록 주문하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세 가지 요청, "생존, 성장, 만남"은 각각 '몫 없는 자', '엄친아', '속물'로 굴러 떨어진 인간의 삶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희망의 모색들이다. 배제와 추방이 아닌 삶을, 자기 착취의 모순이 아닌 진정한 성장을, 자기만의 영예가 아닌 상호 인정과 포용을 지향함으로써, <잉여 사회>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오래된 언명을 이곳에 되살려낸다. 잉여를 만들어내는 잉여 사회에서 잉여들이 만들어가는 잉여-사회로 나아가는 일. 저자는 이 전회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 다음은? 이후의 풍경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저자 자신 또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261쪽) 노파심에 덧붙이건대, 이것은 그저 맥 빠지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단호한 태도로 선언된 어떤 확고한 전망이다. 그렇다. 남겨진 빈칸들을 위한 대안이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로지 우리의 행위로써 채워질 수 있을 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