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장의 공적 사적 인맥을 고루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큰 행운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국내외 거목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교수는 그의 놀라운 혜안과 통찰력, 그리고 정회장과의 진솔한 대화 때문에 특히 기억에 생생하다.
'단절의 시대' '경제인의 종말' '산업인의 미래' '새로운 사회' '경영의 실제' 등 수많은 저서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고, 특히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분석함으로써 경영학의 태두라는 세계적 찬사와 함께 미래학자로서 명망이 드높았던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찾았던 것은 1977년 10월, 초가을이었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일정은 명성에 걸맞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짜여졌다. 그만큼 그를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회와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 그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 국내 기업인들의 면담 요청도 줄을 이었다. 그중 몇 사람이나 실제 드러커 교수를 만날 수 있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드러커 교수 스스로 가장 만나고 싶어 했던 한국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해 10월 12일. 짧은 방한기간 중의 짬을 내어 드러커는 정주영 회장을 찾아왔다. 1915년생인 정주영 회장은 당시 62세, 환갑을 갓 넘긴 나이였고 드러커는 1909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환갑을 넘긴 한국 재계의 거목과 세계 경영학계의 거목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시간은 오후 2시를 갓 넘겼을 때였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손톱으로 퉁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이 창밖에 드리워진 가운데,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세계적인 석학과 보통학교 출신의 걸출한 경영자의 만남은 시작됐다.
달변 대 달변의 만남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정회장이었다.
"세계 경영학의 태두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아,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모두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그야말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통역을 하는 내가 바빠질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회장도 달변이었지만, 드러커 교수 역시 그에 못지않은 달변이었던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회장의 말이 매우 빠른 반면 드러커는 그에 비해 조금 느린 정도라고나 할까.
"지금 정회장께서 저를 경영학의 태두라고 불러주셨는데, 참으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정회장을 뵈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선 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전망했지만 한국처럼 2차 세계대전과 6.25라는 두 개의 큰 전쟁을 치르고도 급성장한 독특한 모델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또 이런 전후의 황무지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를 선두에서 이끈 정주영 회장과 같은 아주 독특하고 위대한 기업경영 모델에 대해서도 역시 연구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저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앞 뒤 안 가리고 기업을 이끈 것뿐이지요. 그게 한국 경제에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봐 주시니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께서는 이미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마저 널리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경영학의 거두 아니십니까. 비단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의 누구나 교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교수님의 그 놀라운 통찰력과 미래 예측에 놀랄 뿐입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고 서로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지만 함께 했던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 진출, 현대 조선 설립, 한국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 모델 개발 등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정주영 회장과 세계 경제의 현안과 흐름에 탁견을 가지고 있는 드러커 교수와의 만남은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참기업가 정신이란
다시 드러커 교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하, 과찬의 말씀. 여기서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정회장만큼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저도 경영학 교수 때려치우고 바로 사업을 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제가 경영학 교수에 머물고 있는 것은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일개 이론가일 뿐입니다. 제가 한국경제와 정주영 회장을 뵙고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론과 머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참 기업가의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배(gut : 배짱)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즉 이론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죠. 정회장은 그런 점에서 거트를 타고 난 사람입니다. 저는 천생 이론가일 뿐이죠."
이날 드러커 교수가 말한 경영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훗날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피력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식 근로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흔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학 교수, 학자 등의 수동적인 지식인과 실천적 지식인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했던 것이다.
칭찬인지 분석인지 모를 드러커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정회장은 바로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렇다면 드러커 교수님, 저처럼 기업을 하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예 우리 둘을 합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머리와 저의 거트가 만난다면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던 정회장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교수님께서 우리 한국경제에 대해서 아직 잘 분석을 하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곳곳을 잘 둘러보시고 좋은 충고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희들은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잔뜩 움츠린 개구리가 더 멀리 뛴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 교수님 같은 세계적 석학을 만나고 보니 지금이라도 우리 경제와 기업 현실을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 안 그래도 한국 경제와 정회장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볼 생각으로 한국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껏 제가 접할 수 없었던 매우 독특한 경제성장 모델이기 때문에 제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동자를 동반자로”
그리고 드러커 교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더 할 얘기는 있지만 말을 아끼는 듯 잠시 망설이던 드러커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한국의 경제 성장은 정말 눈부실 정도입니다. 그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의 발전을 이룬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첫째는 바로 한국 경제가 지나치게 눈앞의 현실에 급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현실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보아야겠다는 정회장의 말씀은 아주 제대로 분석을 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바로 한국의 노사관계입니다."
노사관계! 1977년의 한국에 있어 노사관계란 말은 일종의 금기와도 같았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 분신 이후 서서히 한국에도 노동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노동운동은 때때로 사업 그 자체보다 어려운 숙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는 일단 말을 꺼내자 자신의 견해를 단호하고 솔직하게 피력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제가 한국 경제계를 둘러보니 한국의 노사관계는 거의 종속적인 관계입니다. 이제 노동자를 사용자의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은 바뀌어야 합니다. 즉, 노동자를 회사 경영의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도, 기업가도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까지 한국경제를 잘 이끌어왔지만, 동반자로서의 노사관계를 정립하지 않으면 더 이상은 힘들 것입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무언가 정회장으로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 정회장과 드러커 교수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떠나고 2년 뒤, 한국은 소위 YH사건, 부마사태, '궁정동의 총소리'와 함께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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