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PBEC)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참가국은 태평양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태평양 연안국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 있는 나라 사이의 경제적 협력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회의였다. 당시 캐나다 총선을 통해 갓 총리로 취임한 멀루니가 한국을 찾았던 것은 바로 이 위원회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온 그의 목적은 사실상 이 위원회보다는 다른데 있었다. 위원회에 참석하는 다른 국가 정상들과는 달리 방한 일정을 잡고, 위원회 자체보다는 한국 경제계 인물들과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또 여타 국가들보다 캐나다 경제계 인사들이 대거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채로웠다.
전경련 국제 담당 책임자로서 나는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지만, 캐나다 측의 행보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브라이언 멀루니 총리의 방한 목적에 대해 몇 가지 믿을 만한 정보를 수집해 놓았던 때문이다.
***캐나다 무역역조 빌미로 공세**
당시 캐나다는 한국의 해외 수출에 있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역 물량은 미국이나 일본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북미 수출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세계시장 진출은 눈부신 것이었다. 주된 수출품목은 비록 경공업 중심의 소비재 상품이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의 깃발을 앞세운 우리 물건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그 빠른 속도와 물량의 증가세는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시장을 무섭게 파고들고 있는 중국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손색이 없는 우수한 품질과 가격경쟁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TV·오디오 그리고 중화학공업 제품이나 첨단 제품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서구 각 나라들이 요구하는 안전과 환경 기준에 있어 아직 장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우리의 상품들은 미국이나 유럽 시장 진출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캐나다 수출을 시작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 전초기지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런 점에 대해 우리는 캐나다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캐나다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생색도 많이 냈다.
멀루니 총리의 방한 목적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캐나다간 무역 역조를 해소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캐나다는 우리나라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대신 그들에게 풍부한 석탄. 목재 등을 수입해줄 것을 요구했다.
***멀루니의 속셈은 캔두**
그러나 무엇보다 캐나다에서 우리에게 팔고 싶었던 것은 바로 캐나다에서 개발한 중수로식 원자력 발전 시스템인 캔두(CANDU)였다. 말하자면 멀루니 총리는 이를 위한 이른바 세일즈 외교를 하기 위해 방한을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내로라하는 국가들에 있어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단 그 가격이 엄청난데다가 한 번 건설을 시작하면 그 후속 건설 역시 그 나라에서 담당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 노하우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한국 정부와 담당 관리, 정.재계 인사들에 대한 전방위적 로비를 펼치는 등 원자력 발전소 건설 수주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미국의 웨스팅 하우스, 캐나다의 캔두, 프랑스의 프라마톰 등 이었다.
1986년 4월 말. 멀루니 총리의 방한이 있기 며칠 전 주한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한·캐나다 통상협력회의를 갖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외교 의전 관례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하나 있었다. 우리 쪽 대표를 전경련 회장인 정회장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캐나다 쪽 대표를 경제계가 인사는커녕 대사도 아니고 총리가 직접 맡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몇 차례나 캐나다 대사관에 의전 관례를 들어 총리가 대표를 맡는 것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캐나다 대사관은 그냥 부탁대로 해 달라는 얘기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정회장은 캐나다측이 고집하면 그대로 응하되 우리측이 철저히 대응논리를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캐나다 대사관의 요청대로 정주영, 멀루니를 각각 대표로 신라호텔에서 열기로 결정이 되었다. 예정일은 5월 2일.
한국과 캐나다간의 무역에 있어 캐나다 측에 적지 않은 역조 현상이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캐나다측 의 거센 항의와 요구를 막기 위해서라도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측의 완벽한 준비**
전경련 국제 담당 책임자로서 나는 우선 캐나다의 공격 논리가 어떤 것인지 분석했다. 당연히 먼저 예상되는 공격은 무역역조를 해소하기 위한 우리의 방안은 어떤 것이며, 어떤 물건을 사 주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캐나다의 풍부한 천연자원. 이것은 우리 산업에 어차피 필요한 물건들이니 장기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 관심인 예상되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도 언급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단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전방위 로비가 벌어지고 있고 정책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마당에 섣부른 언급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상되는 공격은 뻔했지만, 대응은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것이었다. 무역 역조가 엄연한 사실인 만큼 그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섣부른 변명이나 회피는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는 또 정주영 회장의 평소 접근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무역역조를 확실히 인정하는 대신 수출품과 수입품의 상세 내역을 정리, 이를 토대로 오히려 캐나다가 한국 제품에 대해 시장논리를 무시한 채 무역장벽을 설치하고 있음을 사례별로 조목조목 지적하기로 했다.
나는 우선 무역과 관련된 국내 굴지의 종합상사에서 캐나다의 공격에 대응할 논리를 개진할 수 있는 기업계 인사들을 물색했다. 이에 따라 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당시 삼성물산의 부사장으로 있던 박웅서 경제학 박사. 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수 경험에다 영어에도 능통한 그는 우리가 찾고 있는 적임자였다.
그리고 나는 전경련 사무국에서 미리 준비한 자료로 그들에게 논리 설명까지 모두 마쳤다. 하지만 어떤 전쟁에도 룰이 있다. 사람을 마구 죽이는 서부영화를 보더라도 등 뒤에서 총을 겨눈다거나 무기도 갖지 않은 상대를 해쳤을 때는 같은 악당끼리도 배척하는 것과 같다.
나는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나는 우리가 준비한 자료를 모두 캐나다 대사관측에 넘겨주었다. 그 자료에는 회의 참석 예정 인물, 발표 의제에서 발표 내용에 대한 개요까지 담겨 있었다. 설사 그들이 우리의 논리를 모두 간파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꼼꼼히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캐나다 대사관은 대사가 공석이었던 관계로 버나드 지루 대리대사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료를 넘겨준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캐나다 측 자료는 넘어오지 않았다. 몇 번 독촉을 하기도 했지만, 주지 않는 자료를 따로 빼낼 수는 없는 일. 그렇게 우리는 캐나다로부터 어떤 인물이 참석하는지조차 제대로 통보받지 못한 채 약속된 5월 2일을 맞았다.
***우리 측의 완봉승**
회의장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악수를 나누는 캐나다 측 인사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감춰져 있음이 엿보였다.
회의는 호스트인 정주영 회장의 환영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회장의 환영사는 짧았지만 캐나다의 입장을 십분 고려, 한국에 대한 그간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각종 치사로 가득 메워졌다. 반면 멀루니 총리의 답사는 그의 굳은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것이었다. 요컨대 한·캐나다 간의 무역역조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의 노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 이는 곧 그간 캐나다가 한국에 보여준 호의에 배치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의 본심이 이어졌다. 무역 역조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만 그중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자본재 수입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들이 정부에 나름대로 힘을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그의 답사는 끝을 맺었다.
비록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의 요구는 대단히 강경한 것이었다.
이윽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사실상 시작부터 우리의 페이스대로 흘러갔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캐나다 측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자료는 물론 우리가 전해준 자료조차 가지고 있질 않았던 것이다.
각종 자료와 정확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리허설까지 마친 우리와 아무런 준비 없이 전장에 나온 그들과는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캐나다 측 참석자들 중에는 통상 전문가가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어린애 손목 비틀기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의 불만과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야기도 우리의 준비된 논리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거꾸로 우리가 칼자루를 쥐게 된 것이다.
결국 이날의 회의는 캐나다 입장에서 볼 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취임 후 첫 번째 외국 나들이에서 나름대로 멋진 성과를 꿈꾸었던 멀루니 총리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고 말았고 따라서 경제계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부담까지 느끼게 되었다.
***캐나다 측의 치졸한 보복**
회의는 짧았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캐나다 대표단이 돌아가고 며칠 뒤, 외무부 유차관보가 나를 불렀다.
“이봐요, 어쩌자고 캐나다 총리를 푸대접해서 보냈습니까? 캐나다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항의 서한이 왔어요. 그냥 한국과 캐나다 사이의 현안 문제나 의논해 보자는 자리에서, 더구나 상대국가 원수 앞에서 온갖 통계 수치를 다 꺼내놓고 망신을 줬다면서요?”
참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먼저 무역역조를 들먹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따져보자고 일부러 자리를 만든 사람들이 누군데…. 하지만 후유증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8월 15일 광복절. 이날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공관에서는 주재국 관리들을 초청하여 기념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하지만 1986년 8월 15일 캐나다에서는 단 한 명의 캐나다 정부 관리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의 보이콧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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