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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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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10>

‘한강의 기적’ 살아있는 전시관 현대조선

한 시대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언어를 통해서 한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긍정적인 언어든 부정적인 언어든 모두 그 나름대로의 쓰임새가 있고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70년대를 상징하는 언어들로 연탄 파동, 혼.분식, 산아제한, 새마을운동, 장발단속, 통행금지... 말뜻이야 새겨보면 알겠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요즘 사람들이라면 그 실상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렇듯 70년대를 상징하는 몇몇 표현들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였던 말이 있다. 바로 ‘한강의 기적’이다.

일제 식민지 36년과 6.25를 거치면서 벌거벗은 국토와 맨주먹밖에 남은 것이 없었던 한국이 10년 그리고 또 10년을 거치면서 세계가 감탄할 만큼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세계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2차 세계대전 후 놀라운 경제 부흥을 이룬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어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고는 했다.

‘한강의 기적’.
그 주요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경제발전 정책 덕분이었는지, 뼈저린 과거의 가난이 한이 되어 잘 살아 보려는 한풀이에 가까운 근로 의욕이 바탕이 됐는지, 중동에서 땀 흘린 우리 노동자들의 노고가 보탬이 됐는지, 총탄이 날아다니는 밀림 속에서 목숨을 걸었던 파월 장병들이 보탬이 됐는지,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묵묵히 견뎌준 우리의 공장 근로자들 덕이었는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 놀라운 경제 발전은 외국인들의 판단으로는 분명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음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보기 위해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았을 때 빼놓지 않았던 곳이 바로 포항제철과 현대조선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현대조선은 어떤 경우에라도 빠지지 않고 끼어드는 단골 코스였다. 말하자면 현대조선은 ‘한강의 기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산 증인, 전시관이었던 셈이다. 또 현대조선은 앞서 ‘템즈강의 불꽃놀이’에서 소개한 대로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켜 세계 조선사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만큼 출범 그 자체가 ‘기적’이기도 했다.

잠시 현대조선(1982년 현대 중공업으로 상호 변경)사사에 기록된 70년대 주요 약사를 살펴보자.

1970년 12월, 그리스로부터 26만톤급 유조선 건조계약.
1972년 3월, 선박 1호선, 2호선 착공.
1973년 12월, 현대조선중공업(주) 설립.
1974년 6월, 조선소 준공 및 1.2호선 명명식.
1975년 5월, 100만톤급 도크 완성.
1976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OSTT) 공사 계약.

당시 손톱깎이 하나 변변히 만들지 못하던 국가에서 이런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것은 가히 세계의 관심을 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면 경제계 인사들뿐 아니라 정부 관리, 각국 의원들 역시 꼭 한번은 보고 싶어 했다. 경제 선진국에서는 호기심 반, 의심 반 그리고 우리와 같은 개발도상국들은 부러움 반, 의심 반의 심정으로...

이러한 현대조선에 대한 정주영 회장 개인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외국 손님들을 현대조선에 ‘모시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의 발전상을 자랑한다거나 개인적인 명예욕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 첫째 목적은 무엇보다 한국과의 거래에 의구심을 갖는 외국 기업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외국 기업들은 정말 노동력이나 기술 기반, 생산성 면에서 제품생산을 맡겨도 되는 곳인가, 돈을 투자해도 되는 나라인가, 경공업 제품을 믿고 살만한 나라인가 등등 한국에 대한 의구심을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을 찾는 수많은 경제계 인사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풀어주기 위해 전경련은 정부 경제 부처들과 상시적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첫째, 우리 경제계 인사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고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설명을 듣고 현황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자리에선 주로 우리의 저력과 방법론적인 문제가 많이 거론되었다. 둘째, 경제기획원을 방문하여 한국 경제의 흐름과 전망, 개발계획 등을 각종 수치와 도표 등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주로 활약했던 인물은 당시 경제기획원 국장이던 김재익씨. 그리고 또 중화학공업 분야의 경우에는 청와대 내 중화학 공업추진기획단 방문이 준비되었다. 당시 단장은 오원철 수석비서관.

이런 만남들을 통해 우리 정부는 외국 사절단들에게 우리 경제의 계획이라든지 외자 유치 계획 같은 것을 상세히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중화학 공업이건 조선분야건 혹은 단순한 소비재 관련 사절단이건 누구도 빼놓지 않고 들렀던 코스가 바로 현대조선이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우리 저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산 전시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통해 때때로 등장하는 현대중공업의 영빈관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호텔급의 숙박시설은 물론 골프장이 부럽지 않은 잔디 정원, 홈 바와 같은 간이 시설까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현대그룹의 손님들뿐 아니라 정부차원에서의 공식 사절단, 전경련 방문단 등 가리지 않고 서울-울산을 오가며 최선을 다하는 정회장의 열성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사절단 방문이 있을 때면 국내에 있는 한, 열 일을 제치고 울산으로 내려와 직접 사절단 일행을 접대하는 것이 상례였다. 브리핑이나 리셉션은 물론 식사 접대까지 일일이 챙기는 재벌 총수의 모습은 항상 외국 손님들을 감격케 했다.

또 하나 정회장의 특징은 이렇게 찾은 손님들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이 있는 우리 정부부처의 고위 공무원들과 정.재계 인사들을 모두 함께 초청해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대규모 연회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때로 이렇게 초청된 손님이 1백-2백명을 넘기도 했다. 일정상 울산에서의 연회가 어려운 경우 정회장이 주로 이용했던 곳은 삼청각.

1972년에 준공된 삼청각은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장소로도 사용되었던 유명한 곳이다. 약 6천평의 대지에 전통 한옥 양식 그대로를 재현한 건물이 6동이나 있어 수백명의 손님을 모시기에도 넉넉했고, 그 아름다움이나 전통 양식이 우리나라를 소개하는데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삼청각 연회에 초대되는 외국 손님들의 경우에도 일차로 현대조선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필수 코스였다.

장소가 바뀌었다 해도 정회장의 정성어린 접대는 역시 마찬가지. 10분의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바쁜 정회장도 이런 연회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1시간 전에 삼청각을 찾는다. 그리고 손님들이 들어갈 방을 꼼꼼히 점검하고 명찰이나 자리배치 등에도 이상이 없는지 살핀다.

한국경제의 신화 정주영 회장은 이제 없다. 그가 즐겨 손님들을 모셨던 삼청각도 이제 옛 모습을 바꾸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난다고 한다. 또 오늘날 현대중공업과 영빈관은 더 이상 한국 경제의 전시장이 아니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것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회장 생전에 한국과 ‘한강의 기적’을 세계에 널리 알리던, 그리하여 한국 경제의 저력과 가능성을 외국의 기업인, 정부 관리들에게 각인시켰던 현대중공업과 영빈관은 70년대 경제발전의 상징으로 당시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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