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사자(死者)의 서(書)’도 죽음의 순간을 중요시 한다. 이 경전은 임종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하고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죽는 순간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고 다음의 삶을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 부디 무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죽는 과정, 그리고 그 뒤 중음(49일간)을 헤매는 영혼에게 스님들이 길안내 역할도 한다.
‘티벳 사자의 서’의 원제목인 ‘바르도 퇴돌’은 사이라는 의미의 '바르'와 둘이라는 의미의 '도', 즉 이 세계와 저 세계 ‘둘 사이’를 뜻하며 죽은 사람이 환생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사후의 중간 상태를 말한다.
퇴돌은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의 뜻이라 한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못한 영혼에게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해탈할 수 있게 한다는 그 성스러운 말을 들려주는 것이다.
바르도, ‘사후의 중간 상태’, 그것은 한국불교에서도 치르는 49제의 49일에 해당하며 중음(中陰)으로 불린다.
‘사자의 서’를 보면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숨을 멎으려 할 때 그를 오른 쪽으로 돌려 눕힌다. 이를 사자(獅子)가 누워있는 자세라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 다음 임종자의 목의 동맥을 부드럽게 눌러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오직 머리 정수리에 있는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 그곳으로 영혼을 내 보낼 수 있게 한다. 브라흐마의 구멍을 영혼의 통로로 보는 것이다.
‘브라흐마의 구멍’, 이곳은 한국말로는 ‘숫구멍’에 해당한다. 정수리의 한가운데가 이곳인데 갓난아기들의 숫구멍을 잘 살펴보면 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을 관찰 할 수 있다. 영혼이 그리로 해서 들어 온 다음 아직 출입구가 덜 닫혀서 그렇다고 보아야 할까. 어른들의 숫구멍은 딱딱한 뼈로 막혀있다.
다른 말로는 백회(白會)라고도 부른다. 인도 요가에서도 이곳을 생명 에너지의 정점으로 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십이상에는 이 정수리에 상투처럼 무언가 봉긋 솟아 있는 모습이 포함된다.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육체적 증표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도, 중국 도교에서도 이 정수리의 솟아난 육괴로 도력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예부터 여성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이 백회가 열리지 않고 솟아 나오지 않는다고 전해지는데……. 요즘 비구니 스님 가운데도 백회가 봉긋 솟은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 무슨 차별의 음모가 있어 보인다.
동맥을 누르고 정수리를 통해 영혼이 나가고, 그렇게 하여 숨이 멎으면 사자(死者)에게 이렇게 알린다.
‘지금 그대의 몸은 상념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불리는……. 오, 고귀하게 태어나는 성향들의 축적이니라. 그대는 피와 살로 된 몸을 지니지 않는 까닭에 오는 것이 소리이거나 빛, 혹은 태양광선의 그 무엇이든지, 이 모든 것이 그대를 해칠 수 없다. 심지어 그대는 죽어 사라지려해도 죽을 수 없다. 그대는 이러한 환영들이 그대 상념의 형상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이것이 바르도임을 깨달으라.’
‘티벳 사자의 서’는 이후 49일간 죽은 이가 해탈할 수 있도록, 아니면 좋은 곳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힌두교 바가바드기타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사람이 낡은 옷을 버리고 다른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몸의 주인도 낡은 육신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육신들로 옮겨 가나니……. 그는 칼로도 베지 못하며 불로도 태우지 못하며 물로 또한 적실 수 없으며 바람으로 말려버릴 수도 없나니 베어질 수도 태워질 수도 없고 적셔질 수도 말려질 수도 없는 이가 바로 그이니…….’
그러고 보면 죽은 영혼은 베어질 수도 태워질 수도 없는 영원한 그 무엇인 것인가. 그렇다면 ‘지옥고’는 무엇으로 어떻게 당하게 되는 것인지…….
임종의 순간에 염한 세계가 저승에서의 거처를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은 불교 정토종에도 나온다. 죽는 순간 단 한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아미타불이 주석하고 계시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좋았던 일, 행복했던 일만 생각하라’이른다. 죽는 순간 한 많았던 일만을 생각한다면 한을 품는 귀신이 되고 말 것이라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죽는 순간 거룩한 이름들을 염하라’는 힌두교, 라마교 등의 가르침이 그 뿌리가 아닐까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