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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生死에 관한 아주 유별난 보고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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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生死에 관한 아주 유별난 보고서 <15>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만일 구도자의 마음속에 ‘나는 병들었으며 육신을 올바로 가눌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스스로 절식을 시작해야 한다. 규칙적으로 식사를 줄여가며 자신의 사악함도 줄여가며,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을 잘 다스려 마침내 거룩한 죽음이 육신에 깃들게 하라……. 그는 이 두렵고도 엄숙한 죽음을 올바로 맞이할 수 있으며 때에 이르러 절대의 무로 녹아 없어지느니라. 이것은 미망에서 벗어난 수많은 현자들이 준행했던 바이며 훌륭하고 적절하며 또한 지극히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엄격한 고행과 금욕의 종교로 알려진 자이나교의 현자들은 죽음을 이처럼 스스로 끌어 들인다. 물론 그들의 단식은 교단의 적절한 도움으로 정해진 법식에 따라 행하게 되며 이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가 청정해지는 것으로 믿는다.

자이나교의 교리를 따른 것이야 아니겠지만 현대의 현자로 불리는 미국인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도 감동을 준다. 미국 산업주의 체제와 그 문화의 야만성을 비판하며, 문명이 아닌 땅에 뿌리 밖은 삶을 실천했던 니어링은 노동문제와 가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경제학자였다.

스물한 살 아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에서 스코트적 인생 마무리를 볼 수 있는데 그 떠남의 미학이 자이나교의 구도자를 닮았다.

스코트는 1백세 생일 한 달 전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무엇을 먹지 않겠다’고 밝힌다. 그는 단식으로 자신의 몸을 벗으면서 ‘죽음의 시간’을 정연하고 의식 있는 가운데 마련하려 했다.

단식 한달이 지나자 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스코트는 시들어 가고 있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다. 단식 한 달 반이 되었을 때 스코트는 마른 잎이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듯 그렇게 숨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좋다’ 한마디.

우리는 왜 스코트의 이 같은 마무리에 감동과 경외심을 갖게 되는가.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자유로이 관찰하고 맞이한 그의 태도가 범상함을 넘어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좋다’는 마지막 한마디에는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요즘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굶는 것과 이로 인해 오는 탈수증은 말기증상의 환자들을 고통 없이 위엄 있게 죽게 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주장해 왔다.

단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굶주림의 고통은 사라지고 갈증도 사라진다고 한다. 환자가 무의식 속으로 기분 좋게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그의 몸 안 장기들 또한 편안한 죽음으로 들어 갈수 있다는 경험적인 얘기다.

불교에서는 소신(燒身)공양이라는 것이 있다. 소신공양은 김동리(金東里)의 1960년대 작품 ‘등신불(等身佛)’에도 나온다. '등신불'의 주인공은 1천2백여 년 전 중국에 살았던 만적스님으로 이복형이 천형의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고 소신공양의 서원을 세우고 식음 전폐, 결가부좌로 앉아 날마다 온몸에 들기름을 바르게 했다. 수분이 빠져나간 육신이 들기름에 잘 절여졌을 즈음 원근의 선남선녀들을 모아놓고 드디어 소신공양을 올리게 된다.

바로 이 장면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들기름 먹인 육신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만적스님 머리 주변에 보름달 같은 원광이 드러난다. 소신공양으로 한줌의 재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등신불로 남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소신공양이 나오는 불전은 법화경이다. 부처님의 법화경 가르침을 들은 의견 보살은 크게 환희심을 내고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의 몸을 태워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1만1천2백세 동안 향기로운 몸을 만들어 드디어 신통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불사르니 광명이 두루 팔십억 항하사 세계를 비추었다 한다.

의견 보살의 소신공양은 어디까지나 상징성의 하나로 경전에 등장한 것이며 ‘등신불’ 역시 소설적 요소가 많다. 현실적인 소신공양은 그 양식의 처절함 때문에 이를 주변에서 허락할리 없다.

현대사 속에서는 1960년대 베트남의 쾅 툭 스님을 비롯한 몇 명의 스님들이 거리로 나와 결가부좌한 채 몸에 기름을 끼얹어 소신공양을 올린 적이 있다. 정치성도 얼마간 있었던 이 소신공양을 사람들은 분신자살이라 했다. 아마 부처님도 이를 소신공양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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