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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生死에 관한 아주 유별난 보고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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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生死에 관한 아주 유별난 보고서 <16>

이렇게 죽기도 했다.

근대 한국선종의 중흥조로 널리 알려진 경허(鏡虛)스님 아래로 ‘경허의 세달’로 불리는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지금의 유명도로 말하면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스님 순이다.

만공은 생각하는 바가 넓고 깊었으며 혜월은 천진불이었고 수월은 자비로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형과 아우로 따지면 수월 혜월 만공스님의 순이 되는데 수월스님은 맏형답게 수행의 깊이에서나 두타행(일종의 무소유의 실천이다)의 실천에서나 두 아우를 훨씬 능가하는 일생을 살았다.

천장암에서의 수행에서 한밤, 온 하늘을 밝히는 방광(放光)으로 해탈의 경지에 든 스님은 이후 한번 본 것 들은 것을 잊지 않고 잠이 없어졌으며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어느 절에 가서나 이름을 숨기고 불목하니 노릇에 충실했는데 어쩌다가 금강산 마하연의 조실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수월스님은 조실에 걸맞은 법상위의 법문이나 그런 것을 한 적도 없이 곧 금강산을 떠나 나라 잃은 백성들이 정처 없이 흘러드는 만주로 가서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만들어 유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보살행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만주유민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로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수월스님의 열반 모습 또한 심상치 않았다. 세속나이 일흔넷, 남을 위해 뼈아프게 일만 해온 스님은 여름 결제전에 자신의 다비식에 쓸 장작들을 차곡차곡 재어놓는다. 아무에게도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알바 없다. 다만 스님을 따라 다니던 호랑이 한마리만 슬프게 스님 주변을 맴돌았다 한다. 그해 여름 해제 다음날, 점심공양을 끝내고 ‘개울에 가서 몸을 좀 씻겠다’며 방을 나간 후 얼마 후 스님은 개울가 바위 위에 단정히 결가부좌한 채 열반에 든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 입던 옷 한 벌을 곱게 접어 새 짚신 한 켤레와 함께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그 희한한 모습이란…….
평생 남을 위해 밥하고 나무하고 짚신 삼고 병 고쳐주고 집짓고... 그런 성심은 짐승들에게도 통해 스님 곁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산짐승들이 언제나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한국의 성 프랜시스라고도 할 수월스님이 우리에게 떠들썩한 이름을 남기지 않은 것은 그의 지극한 보살행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오른쪽 옆으로 누워 열반에 드셨다. 그러나 스님들은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거나 나무 가지를 잡은 채 입적하거나 물구나무선 채 입적하는 등 죽음이란 마지막을 특이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스님들의 육신불이나 열반상 등이 그것이다.

9세기 중국 당나라 때 보화(普化)스님은 평소 방울을 흔들고 다니며 마을마다 가르침을 펴고 다녔는데 그의 입적 또한 특이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관을 만들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내일 동문 밖에서 죽겠다’고 선전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 밖으로 모여들었으나 그는 아직 청조(靑鳥)가 오지 않았다며 내일 남문 밖에서 죽을 것이라며 죽음을 연기했다. 그 다음날은 다시 서문, 또 그 다음날은 북문 식으로 연기를 하니 북문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자 마침내 스님은 방울을 한참 동안 흔들고 관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뚜껑을 닫은 다음 그대로 입적했다.

중국에서 조동종을 개창한 동산양개(洞山良价)스님은 죽음의 문지방을 두 번이나 멋대로 드나들었다. 어느 날 삭발 목욕 후 가사장삼을 갖추어 입고 대중들을 모아 법문을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울기 시작하자 동산스님은 다시 눈을 뜨고 울지 말라고 일렀다.

대중들은 그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재를 올렸는데 동산스님은 7일간의 재를 마치고 잿밥을 먹은 후 다시 그 자리서 열반에 들었다. 물론 결가부좌의 자세로…….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의 죽음은 그런 고승들과는 좀 다르다. 당시 불안했던 정정을 피해 시골로 내려가던 중 이질에 걸려 한 달여를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그는 세 아들에게 ‘나는 악한 짓 한적 없어 지옥 가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웅산 기슭에 아내와 합장해 달라’유언했다.

그때 친구 유림장로(維琳長老)가 줄곧 그의 곁에 있었는데 소동파는 마지막 시 한수를 짓고 장로와 더불어 이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불가의 염불을 좀 외워 보라고 권했다. 아마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아미타불’을 염해보라 했을 것이다. 소동파 왈, ‘내 고승전을 읽어보니 그들도 모두 죽었더라. 서천이 있다한들 애써 그곳에 가서 무슨 소용있으랴. 억지로 애쓰는 것 또한 잘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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