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멕시코 고향마을 벌판에 버려져 독수리 밥이 되고 싶다. 그런 다음 독수리 배설물이 되어 멕시코 땅에 이 몸이 흩어지기를....”
2001년 6월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앤서니 퀸은 자서전에서 그의 육신이 이렇게 흔적 없이 흩어지기를 바랐다. 살았을 때의 그가 멋지게 보인 것은 이미 깨우친 이 같은 무상(無常)의 도(道) 때문이었을까.
16세기 한국 슈퍼스타, 명기 황진이( 1502?ㅡ1540)의 유언도 멋있다.
“내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길가에 버려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게 해 천하 여인들로 하여 경계케 하라.”
하지만 위 두 사람이 남긴 말은 사후 그대로 실천되지는 않는다.
황진이의 경우 당시 그녀의 ‘팬’들이 그녀를 황해도 장단 근교에 고이 묻어 주었고 몇 십 년 후 조선 문인 임제(林悌 1549ㅡ1587)라는 이가 그녀의 묘를 찾아 묘 앞에 술상 차려놓고 혼자 권하고 마시며 시조를 지었는데, 바로 저 유명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 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였던 것이다.
임제는 이 시조 때문에 삭탈관직 당하였다는데..... 죄명은 글쎄 잘은 모르겠으나 품위문제였던가.
사체를 먼저 새나 벌레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은 티베트이나 라마교국에서 행해지는 조장, 또는 풍장에서 볼 수 있다. 티베트 조장의 경우 사람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는데 특징이 있다. 높은 산, 독수리들이 시신의 살점을 뜯어 먹은 다음 남은 뼈는 다시 망치로 잘게 부수어 밀가루를 섞어 반죽하고 그 반죽 덩어리를 다시 독수리에게 던져주어 뼈까지 드시게 만든다.
그야말로 육신의 흔적 없애기 작업으로, 이유는 영혼이 혹여나 육신에 집착, 부질없이 돌아오려 애쓰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던가. 그러나 힌두교에서처럼 덕 높은 고승의 몸은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한다.
인도를 중심한 화장풍습은 19세기 서구사회로도 옮겨 가는데....
1895년 프레드리히 엥겔스는 죽으면서 “화장을 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심판의 날에 몸 그대로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어 매장을 당연시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공산사회주의자가 했을법한 유언이다.
화장한 그의 유회는 친구들의 손으로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에 놓인 도버해협에 뿌려졌다. 이 해는 영국 런던교외에 처음으로 화장장이 들어 선 해이기도 하니 독일인 엥겔스가 영국의 화장권장에 가장 앞장선 셈이 되는가.
엥겔스와 같은 독일 태생인 사회주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는 영국 런던 인근 하이게이트 묘지 안에 아내와 정부, 딸 등 6명의 가족들에 둘러싸여 그야말로 행복하게 잠들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골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엥겔스의 선택을 따랐다.
1969년 문화혁명의 혼란기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전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는 평소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큰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며 혼란스러웠던 시국 탓에 그 유언은 1980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주은래(周恩來) 전 수상 역시 화장과 산골을 택했다. 1976년 죽기 전 주은래는 “유골을 조국의 산하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그가 학생시절을 보낸 천진시(天津市)와 황하 유역 등 세 곳에 나누어 공중에서 유회를 뿌렸다. 16년 후에 사망한 그의 부인 역시 그 뒤를 따라 남편과 만났던 추억의 장소였던 천진시의 한 냇가에 유회를 뿌리게 했다.
1997년 사망한 20세기 마지막 중국 최고지도자였던 등소평(鄧小平)의 유회가 북경에서 비행기에 실려 유족과 공산당 간부들의 손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금 중국이 자랑하는 1백% 가까운 화장률은 이 같은 정치지도자들의 솔선수범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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