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큰 무덤을 남기고, 옛 무덤들은 요즘 한참 돈을 벌어 들인다. 인류기원을 살펴보는 고고학의 상당부분도 이 무덤들을 뒤적인다. 그렇게 발굴된 무덤과 거기에 얽힌 신화 전설이 현대인들에게 ‘잘 팔리는’ 것이다.
근자에 한국에서도 잘나가는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라든가 ‘태양의 여왕’등에는 고대 이집트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데 어느 소설에서나 왕릉조성과 왕릉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의 왕릉은 어느 파라오(이집트 왕의 칭호)든 그가 즉위하면서 스스로의 묘역을 조성하게 되며 이를 자신의 저승 거처라 생각했으므로 왕궁 못지않은 규모로 만들려했을 것이다.
소설 ‘태양의 여왕’에는 저 유명한 투탄카멘(재위 기원전1361-1352)묘의 주인 투탄카멘왕의 왕비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수많은 이집트 왕릉 가운데 투탄카멘 왕릉은 흔치않은 처녀 분으로 발굴되었고 ‘파라오의 저주’등 발굴 후일담도 그럴듯해서 가장 유명하다.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황금 가면이라든가 수많은 값진 유물들도 발굴자들을 놀라게 했다.
투탄카멘은 이집트 신왕조(기원전1590-1085)중 18왕조 말기의 파라오로 아멘호텝의 아들이자 이교도 파라오로 우상파괴주의자였던 아케나톤의 셋째 사위였다. 아케나톤은 유일 태양신인 아톤만을 믿었다. 다신교인 전통종교의 성직자들과는 자연 적대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투탄카멘의 비극은 유일신을 믿는 아케나톤의 사위가 됨으로써 시작된다.
아케나톤의 셋째사위가 된 파라오는 이름을 투탄카톤(아톤의 살아있는 상징이란 뜻)으로 썼다. 처음 유일신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죽고 다시 권력이 전통 종교 쪽으로 기울자 이름을 투탄카멘(아멘의 살아 있는 상징이란 뜻)으로 고쳤다. 아멘신은 여러 신 가운데 왕으로 전통종교에서 떠받드는 신이었다.
그럼에도 전통주의자들은 그가 장인이 믿었던 아톤 신에게도 경배하는 것을 못 마땅이 여겨 투탄카멘을 역사 속에서 망각시키려 시도한다.
9세에 즉위한 그가 9년 후인 18세에 요절한데에도 그런 의혹이 제기되며 그가 역사에 남긴 발자국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점 또한 같다. 이집트의 파라오치고는 ‘한 많은 파라오’였을 것이며, 유일신을 믿었던 아버지 파라오 사후 겪었을 왕비 아케지의 고난과 번민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작가의 소설 ‘람세스’에서는 아케나톤이 믿었던 유일신 사상이 람세스시대 모세를 통해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그런 점도 은근히 내 비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유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이집트에서 실패한 아케나톤의 유일신 신앙을 살린 것이며, 7세기 당시 전통 다신교와 싸워 지금의 일신교 이슬람을 일구어 낼 수 있었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케나톤의 환생으로 그를 통해 옛 서원을 이룬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말하면 혹시 신성모독이 될까. 그렇다면 실례.... 그러면 작가 반덴베르크가 ‘파라오의 음모’란 제명의 소설 속에 등장 시
키기도 한 이집트의 가장 화려했던 고분, 20세기에 그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며 숫한 이야기 꺼리를 제공했던 투탄카멘 묘의 발굴 후일담을 보자.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자금출자자 카나본 경(卿)이 1922년 이집트 수도 부근에 있는 ‘왕 묘의 골짜기’에서 ‘투탄카멘의 묘’를 발굴한 뒤, 발굴 책임자인 카터만 빼고 후원자인 카나본 경과 발굴에 관여했던 대학교수, 고고학자, 기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연사를 하지 못한 것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이에 ‘소년 왕 파라오의 저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나본 경은 발굴 때 맨 처음 무덤 속으로 들어 간 사람이었다. 그런데 발굴 다음해에 어처구니없게도 모기에 물린 자국에 염증이 생기면서 패혈증에 걸려 제일 먼저 세상을 뜬다.
이때부터 각종 매스컴에 흥미위주의 ‘저주’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무덤의 한 문짝에 고대 이집트 글씨로 “이 성스러운 묘소에 들어오는 자는 죽음의 날개의 습격을 받으리라”라고 쓰여 있었다는 등 ‘긴가 민가’하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비록 모두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이 밖에도 “나의 이름, 나의 상에 손을 대는 자들은 파멸을 면치 못하리라”라는 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덴베르크가 쓴 ‘파라오의 저주’라는 소설에도 비슷한 내용의 비문 이야기가 나온다.
1962년에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사인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기도 했으며 조사 결과 미라에 있던 밝혀지지 않은 세균의 영향이거나 또는 풍토병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