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1백여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방금 작고하신 모습 그대로’현대에 그 자태를 드러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못 믿겠어도 믿어야 한다. ‘마왕퇴의 귀부인’이라고도 불리는 이 한(漢)나라의 귀족여성은 중국 보존과학의 우수성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방부 처리돼 ‘살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지금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호남성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람세스’나 ‘태양의 여왕’이 이집트학을 전공한 프랑스 작가가 쓴 이집트이야기라면 웨난(岳南)이란 중국의 젊은 작가가 요즘 정력적으로 써내고 있는 소설들은 중국 고대 무덤 이야기들이다.
‘황릉의 비밀(원제목 風雪定陵)’‘구룡배의 전설(원제목 日暮東陵)’‘ 부활하는 군단(復活的 軍團)’‘마왕퇴의 귀부인(원제목 西漢亡魂)’등 웨난의 소설은 모두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사실에 충실하게 쓴 소설이어서 중국에서 기실(紀實)문학 장르를 새롭게 구축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들 소설이 한국에서도 번역돼 나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근년에 들어 우리 독서계에는 고대 무덤이야기가 잘 팔리고 있다 할 것이다.
마왕퇴(馬王堆)에서 ‘퇴’란 총(塚)과 같은 뜻으로 마왕의 묘란 뜻이다. 마왕퇴란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이들 3곳 무덤에는 전한(前漢)시대 살던 귀족 부부와 그 아들의 묘가 조성돼 있었으며 1972년 발굴 당시 기적적으로 ‘방금 작고하신 모습’그대로 나온 분은 바로 아내이며 어머니였던 ‘귀부인’ 한사람이었다.
2천년 넘어 부패하지 않고 견뎠던 ‘귀부인’의 위속에는 싱싱한 참외 씨가 137개가 나와 죽기 두세 시간 전에 참외를 먹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첫 발굴 때 무덤에서 새어 나온 푸른색의 가연성 가스 채취를 하지 못해 보존처리 비법의 중요한 단서를 놓치고 말았다.
발굴 초기 무덤에서 새어 나왔다는 푸른색의 불붙는 기체는 중국에서 비교적 시신이 잘 보존된 무덤에서 곧잘 나오는 것이라 한다. 이 같은 무덤을 중국에서는 화동자(火洞子)묘 또는 화갱묘(火坑墓)라 부른다는데.....
중국에는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 옥편 수천 개로 시신의 온몸을 빈틈없이 싸두는 옥의가 그것이다. 중국에선 예부터 사람이 죽었을 때 구규(九竅), 즉 눈 귀 코 등 9개의 구멍을 옥으로 틀어막으면 생명력의 외부 방출을 막을 수 있고 부패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손에도 악(握)이라 하여 옥으로 만든 돼지, 옥돈(玉豚)을 쥐어 준다고 한다. 그 위에 전신을 감싸는 옥으로 만든 수의를 입히는데 이는 기(氣)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의 옥편도 값이 엄청날 텐데 그 옥으로 몸 전체로 둘러싼다면 아마 대단한 부자거나 황제나 황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옥으로 만든 수의가 나온 무덤은 8군데 정도.
그 가운데 하북성(河北省) 만성(滿城)에서 발굴된 유승(劉勝. 한무제의 형) 부부 묘에서는 남편의 수의에 2천690개의 옥편이, 그리고 부인의 수의엔 2천156개 옥편이 금실로 곱고 정교하게 꿰어져 있었다.
얼마 전 한국에도 동한(東漢)시대의 옥제수의라는 옥의를 국내에 들여와 판매하려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옥 값으로만 15억원을 호가했다고 하던가. 무덤 속에 이처럼 귀한 보물을 넣어 두었으니 도굴꾼들이 생길 수밖에...
서기 220년, 66세에 죽은 난세의 영웅 조조가 도굴꾼의 시조쯤 된다고 보아도 좋다. 그는 당시 무덤 속에 있던 보물들을 꺼내 제법 두둑하게 전비를 챙겼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도굴 경험 때문인지 그는 죽기 전 “천하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만큼 법도에 따라 거창한 장례를 치를 필요가 없다. 장례가 끝나거든 곧 상복을 벗고 주둔지 장병은 부서를 떠나지 말라. 내 시체에는 평복을 입혀야 하며 관속에 금은보화를 넣어서도 안 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魏志)
왕후 귀족들의 묘를 파헤쳐 보물을 꺼내 썼던 사람으로서 그는 무덤은 반드시 후인들에 의해 훼손될 것임을 미리 안 것이다. 대신 시녀와 사랑하던 첩들에게 재화와 보물을 나누어 주고 모두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편히 살도록 하라는 인간적인 배려를 해 죽은 후에도 이들에게 인기를 잃지 않았다 한다. 조조의 유언에 따라 그의 후손, 위나라 황제들도 ‘무덤만은 검소하게’를 철칙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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