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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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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2>

음악회에서 박수치기

무슨 책을 읽어야지, 하는 작정도 없이 손에 닥치는대로 아무 책이나 읽던 시절이 있었다(그걸 남독濫讀이라고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도 그 버릇이 약간 남아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는 무슨무슨 ‘역사’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이다. 이를테면 ‘의자의 역사’, ‘키스의 역사’, ‘향수의 역사’, ‘죽음의 역사’ 같은 책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잡다한 상식에 관한 책이나 ‘누가 처음 시작했을까?’ 같은 만물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때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더 좋은 건 읽고나서 뒤돌아서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에 꼭 그런 사람 한명씩은 있다. “몇 년 전 여름에 말야,” 하면 “1996년 여름 기온이 삼심칠점사도까지 올라갔던 해 말이지?” 정확히 기억하는가 하면 아스피린 하나를 먹는데도 “비마약성 진통제인 이 아스피린이 일반 약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건 1899년부터라구, 성분은 버드나무와 흰꽃조팝나무에서 추출된 약물.” 당구를 치러가면 “당구는 루이 14세 때 의사들이 식사 후의 소화제로 권장한 게임이었다는 건 알아?” 하는 사람. 그냥 내버려두면 점입가경이다. “의자의 변천사는?” “코르크는 스페인 집시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는 건 알아?”

곁에 있던 누군가가 “목화씨 정돈 어떻게 들여왔는지 알지” 라고 응수할 땐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걸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거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상식이 지나치게 풍부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상식이란 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 때가 다반사다. 그걸 잘 모른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알고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다면 음악회에서는 언제 박수를 치는가.

잘 알고 지내는 S일보 음악담당기자와 정경화 사계四季 공연에 함께 갔다. 한 번도 정경화의 공연장엘 가본 적이 없던 터라 더더욱 기대가 컸다. 부활절의 달걀들처럼 화려하게 치장을 한 인파들로 공연장은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첫곡은 제미니아니 합주협주곡 1번 D장조. 거기까진 좋았다. 두 번째 곡인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D단조 2번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동행과 나는 오늘 음악회 관중들 수준이 아주 높다고 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핸드폰이 울리지도 않았고 중간에 박수를 치는 사람도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물론 나는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2부는 비발디의 사계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정경화의 열정과 삼층 객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연주솜씨만큼이나 빛나고 대단했다. 귀에 아주 익숙한 사계 중 ‘봄’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망설이다가, 혹은 약간의 눈치를 보다가 이윽고 나는 열렬히 손뼉을 쳤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다보니 동행은 약간 냉소적인 표정을 띤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봄’이라도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봄이 다 끝난 것도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수십여명의 실수는 그 뒤로 더 이어졌다. 가을이 다 끝난 거라고 박수를 쳤는데 가을은 다시 시작되고 겨울이 다 끝났겠거니 생각하고 박수를 쳤는데 겨울은 그 뒤로도 세 번이나 더 끊어졌다 이어졌다. 그 중간에 한 번 내 동행인 음악담당 기자가 큰 박수를 쳐댔다. 아직 음악이 끝나지도 않은 걸 알고나선 그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순간은 정말 깨소금맛이었다.

사람들은 악장과 악장에 상관없이 정경화의 연주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진정한(!) 음악 애호가들이라면 끌끌 혀를 찰 노릇인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떤 이들은 무대 위로 꽃을 던지기도 했다. 그 꽃은, 정경화와 그녀와 함께 연주했던 세종솔로이스츠들이 모두 다 들고갈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나는 꽃을 던지는 대신 손바닥이 다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앵콜곡이 계속 이어졌다. 나의 동행도 이젠 나를 따라, 아니 객석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또 무슨 행운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가게 되었다. 거기선 나는 대단히 조심히 박수를 쳤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눈치였다.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싶어도 가만, 지금 박수를 쳐도 될 타임인가? 반신반의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누군가 한 사람, 드러내놓고 박수를 치지 않았다면 모두들 큼,큼 끝내 기침이나 하다 말 것만 같았다. 결국 그날 공연은 커튼콜에 가서야 커다란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고 있던 나도 그때쯤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정경화 공연을 보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오면서 나는 마치 알고는 있었다는 듯 슬쩍 동행에게 물어봤다. 악장과 악장 사이엔 박수치는 거 아니지? 그러나 속으론 그게 무슨 대수냐,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게 사실이다.

나는 자주 갈등하는 편이다. 상식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아는 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역시 상식은 몰라도 그만 알고 있어도 그만인 때가 많다. 상식이란 게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기도 하고 또 그걸 벗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기도 하다.

음악회도 다 끝났다. 관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무대 위로 꽃 한송이씩을 던지던 장면이 쉬 잊혀지지 않는다. 한해가 또 이렇게 간다. 모두에게, 서로에게 꽃을 던지는 한해가 되길 바란다. 謹賀新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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