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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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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6>

영어공부, 할까 말까?

한때 영어회화를 배우고자 학원을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서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 건 나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튼 그땐 절실하게 영어공부를 할 필요를 느꼈고(나는 그때 홀홀 단신으로 유럽여행을 가야지, 하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었다) 일주일 네 번 수업을 가끔씩만 빠져가면서 공부하러 다녔다. 그러나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때 수업을 들었던 한국인 영어선생 JC에게 한 일년만에 이메일이 왔다. 내용인즉슨, 동료 중에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여성작가가 있는데 한국작가를 만나보고 싶다, 한국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을 쓰고 있는데 캐릭터에 관해 자문을 구하고 싶어한다, 내 생각에 네가 적격일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다음주 토요일에 만나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게 어떨까? 였다(편지는 영어로 쓰여 있었다). 다음주 토요일이라. 나는 일주일 동안 망설였다. 일주일 동안 벼락치기로 회화공부를 해야지 해야지, 하는데 그만 후딱 일주일이 지나가버렸다. 나는 약간 주눅이 든 상태로 약속장소에 나갔다.

점심을 먹고 나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흘렀다. 쥘리안이라는 영국 작가는 나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해 한참 이야기했다. 나는 맞장구를 치듯, 이봐, 난 사실 영어를 잘 못하거든? 그러니 좀 천천히 이야기해줄래? 이봐, 게다가 나는 리스닝이 아주 젬병이거든? 그러니 좀 쉬운 말로 해줄래? 이봐, 이건 말이지 한국말로 토론해도 어려운 주제라구! 속닥거렸다. 말을 천천히 하는 것도 잠시, 쥘리안은 금방 잊어버리고 내처 빠른 말로 이야기를 해나갔다. 한때 내 영어선생이었던 JC가 쥘리안에게 그런다. 이 친구 말은 신경쓸 것 없어, 내가 만났던 내내, 난 영어를 못 해, 난 영어를 못 해, 했다구, 이건 그녀의 버릇이야, 게다가 그녀는 한국말을 할 때도 어려운 말을 쓴단다, 라고. 쥘리안이 웃었다. 나는 아니야 아니야 손사래를 쳤지만, JC가 조크하는 거야, 라고 한사코 부인했지만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못 알아듣겠어서 내가 JC에게 통역을 좀 해줄래?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벼락치기라도 하고 나오는 걸 그랬네, 나는 후회했다. 장작 다섯 시간만에 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음, 쥘리안, 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겠어. 그런데 내겐 그 문제에 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나중에 너에게 이메일을 보낼게! 제법 호기롭게 말하고는 말이다. 이런 젠장, 이런 젠장, 나는 중얼거리면서 총총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열흘 전이다.

외국인 친구 두 명이 있었다. 그 친구들을 잃게 된 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어느날 캐서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이, 켱난!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사위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무척 반가워하는 어투로 말했다. 너 정말 오랜만이구나, 나 너 보고 싶었어, 어때 잘 지내니? 야, 그런데 내가 지금 몹시 바쁘거든? 내가 나중에 전화하면 안 될까? 캐서린이 이사했다며 새 연락처를 가르쳐주었다. 받아 적기는 했으나 나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영어공부를 그만둔 지 이년만에 온 전화였으니, 그동안 공부한 걸 다 까먹어버렸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서 함께 밥을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내 의사를 영어로 제대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게 너무도 불편했고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좀 소극적인 데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또 한사람, 잭. 지난 연말 정경화 사계(四季)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가 하이, 켱!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그가 이년 전 내가 듣던 영어 클래스 선생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몇몇이 어울려 꽤 오랫동안 그와 친분을 유지하곤 했었다. 물론 연락을 먼저 끊은 건 나였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얼른 선수를 쳤다. 이봐 잭, 나 그만 가봐야겠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우리는 악수를 나눴다. 내가 다시 잭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건, 이미 짐작들 하시겠지?

처음에 회화를 배우겠다고 결심했을 땐 유럽여행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많은 책을 보고 싶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곳의 역사나 문화를 현지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꿈이라는 게 단지 꿈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꿈을 포기한 채 이 부박한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는가. 내 꿈은 소박했다. 지난 늦여름, 괴테하우스에서 소설 낭독을 할 일이 있어 독일에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언어 때문에 큰 불편을 겪었다. 통역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바디 랭귀지나 눈빛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나는 답답했다. 알고 싶은 것,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 그 중 많은 것들을 지레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돌아가자마자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리라!
그 굳은 결심을 까먹는 덴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영어를 못해 불편을 겪는 일이 늘어만 간다. 차라리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면 아, 난 영어를 못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면 그만일 텐데 내 경우엔 그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 영어 아주 조금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금방 '조금'이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달려든다. 물론 내가 지금 영어를 세계 공영어로 쓰자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필요를 느낄 경우가 있다면, 그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공부하면 되겠지. 지금이라도 당장. ……당장?

그림을 배우든 금연을 하든 영어공부를 하든 운전을 배우든 다이어트를 하든 조깅을 시작하든 한자를 익히든 다 좋다. 그 결심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작심(作心)이 삼일(三日)이라는 거다. 특히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벌써 삼월이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켠 김에 이메일을 열어보았더니, 아, 쥘리안에게서 길고도 긴 편지가 와 있었다. 뭐라고 답장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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