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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느와르와 차가운 하드보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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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느와르와 차가운 하드보일드

[김이석의 올드 & 뉴] 김성수의 <야수>와 커티스 헨슨의 <L.A. 컨피덴셜>

감독이 영화의 두뇌라면 배우는 영화의 육체이며 영화의 얼굴이다. 일상에서도 그런 것처럼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영화가 선사하는 원초적인 즐거움 중 하나다. 비록 영화에서 배우들은 스크린 위에 투영된 이미지로만 존재하지만, 관객은 상상력을 통해 그 부재를 적극적으로 상쇄시킴으로써 이 환영적인 만남의 즐거움을 지속시켜 나간다. 로베르 브레송이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혹은 네오리얼리즘의 여러 감독들처럼 배우와 관객 사이의 환영적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감독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왔다.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버디무비' 역시 영화적 육체인 배우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다. 헐리우드 최고의 매력남인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을 등장시킨 <내일을 향해 쏴라>(조지 로이 힐, 1969)와 <스팅>(조지 로이 힐, 1973)이나, 대표적인 느와르 배우인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가 출연하는 <히트> (마이클 만, 1995) 등이 버디무비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런 남자배우들의 조합은 때로 1+1 이상의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L.A.컨피덴셜(左)과 야수(右) ⓒ프레시안무비
올 겨울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곽경택 감독의 <태풍>이나 김성수 감독의 <야수>는 이정재와 장동건, 유지태와 권상우라는 남자배우들의 조합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버디무비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성적인 스타 검사와 물불가리지 않는 열혈 형사를 짝지운 김성수 감독의 <야수>는 두 배우의 남성적 매력을 한껏 강조한 형사물이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강력반의 문제형사 장도영(권상우)과 차가운 이성에 강한 추진력까지 겸비한 검사 오진우(유지태). 첫 만남부터 삐걱대던 이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들이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힘을 모은다. 그들의 적은 막강한 조직에 정치적 배경까지 갖춘 조폭 두목 유강진. 언론플레이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유강진과의 싸움은 결코 녹록하지가 않지만 시련을 겪으면서 두 남자는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이 공동의 적을 퇴치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형사물의 대표작으로 커티스 헨슨 감독의 <L.A. 컨피덴셜>(1997)을 꼽을 수 있다.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거장 제임스 엘로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L.A. 컨피덴셜>은 50년대의 로스엔젤리스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이다. 영민한 두뇌의 신참 경관 에드 액슬리(가이 피어스)와 무시무시한 완력을 가진 곰 같은 강력계 형사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우). 무심함을 넘어 서로를 경멸하던 이 두 남자들을 하나의 운명체로 엮어놓은 것은 사소한 유치장 난동이었다. 신문의 가십거리에 불과한 이 소동은 거대한 권력과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 싸움을 통해 두 남자는 협력자의 관계로 발전하였다가 마침내는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우수한 두뇌가 무기인 오검사와 엑슬리 형사, 그리고 믿는 것이라곤 자기 몸뚱이 하나 뿐인 장형사와 버드 형사. <야수>와 <L.A. 컨피덴셜>의 주인공들은 이처럼 서로 무척 닮은꼴이지만 그들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의 분위기는 대조적이다. 원작의 분위기까지 살려낸 커티스 헨슨의 <L.A. 컨피덴셜>
L.A.컨피덴셜 ⓒ프레시안무비

먼저 커티스 헨슨의 <L.A. 컨피덴셜>은 추리소설을 사회소설로 승화시켰다는 찬사를 듣는 원작가 제임스 엘로이의 매력이 십분 살아있는 작품으로 커티스 헨슨 감독은 원작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원작 문체의 특징마저도 자신이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영화가 원작이 가진 건조함과 차가움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음악과 내레이션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사용되는 경쾌한 재즈음악과 극적으로 과장된 내레이션의 독특한 분위기는 유혈이 낭자한 사건들로부터 관객들을 한 걸음 떨어진 관조자로 만듦으로써 영화의 전체적인 온도를 하강시킨다. 반면 김성수 감독의 <야수>는 시종일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뜨거운 느와르영화다. 특히 온 몸을 내던지면서 사건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장형사의 모습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상과 맞서는 오검사의 모습은 낭만성이 넘치는 홍콩 느와르의 영웅적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영웅본색>(1986)으로 대표되는 오우삼류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런 영웅적인 인물들은 범상치 않은 희생정신과 동료애를 가진 인물들로 그들의 존재와 행동양식은 비현실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모방심리를 강하게 자극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술방식에 있어서도 두 영화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하드보일드 추리물 특유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간직한 커티스 헨슨의 <L.A. 컨피덴셜>이 인물들의 내면보다는 사건의 전개에 주목하고 사건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의 양식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반면, 김성수의 영화는 관객들이 충분히 등장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인물들의 주변사와 심리를 묘사하는 일에 영화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영화는 이따금씩 극의 전개를 멈추면서까지 주인공들의 내면적 상태를 묘사하곤 한다. 특히 오검사와 장형사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받으며 동일시되어가는 부분에 대한 묘사에서는 <첩혈쌍웅>(오우삼, 1989)과 같은 홍콩 느와르의 흔적이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홍콩 느와르의 전통을 따르는 <야수>
야수 ⓒ프레시안무비

<야수>가 홍콩 느와르의 전통에 속한다고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간의 힘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서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오검사와 장형사의 관계는 후반부에 이르러 오검사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좌절하는 순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오검사의 패배가 촉발시킨 장형사의 분노는 그를 진정한 야수로 돌변시킨다. 그리고 오검사의 몫까지 감당하면서 산화해간 장형사의 죽음 앞에서 오검사는 이제까지 자신을 버리고 제 2의 장형사로 변해간다.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한 인물이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마저도 자신의 자장 속으로 흡수해버리는 방식은 주윤발과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를 앞세운 오우삼류의 낭만적 느와르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야수>가 영웅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로 초점을 이동시켜가고 있는 반면 커티스 헨슨의 인물들은 마지막까지 자기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우수한 두뇌와 육체적 힘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거대한 적에 맞선다. 독특한 점은 이들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도 진정한 승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승자이기보다는 패자처럼 보이며 이전보다 더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인물들이 아니라 바로 L.A.라는 대도시이기 때문이다.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악의 세력은 환영적인 도시 엘에이가 가진 익명성의 결과물이며, 사방에서 등장하는 적들에 포위된 주인공들의 모습은 통제불능의 거대도시에서 물상화된 관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무기력한 현대인들의 초상인 셈이다. 그리고 이 도시와 인간이라는 사회적인 문제의식이야말로 제임스 엘로이와 커티스 헨슨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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