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은 그들 영화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바깥'에 위치한 감독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주인공들이 타의에 의해 추방당한 존재들이라면 이 감독들은 기꺼이 '바깥'에 서기를 선택한 감독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만큼 영화에 대한 생각, 제작과정, 구성 원리 등 모든 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영화에 대한 상식을 부정하고 넘어선다. 그들은 16mm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비전문배우들과 작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 외적인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자신들의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히 영화 외곽에 서있는 이 감독들에게 영화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칸영화제는 이들에게 이례적으로 두 차례의 황금종려상을 헌정하였다. <리베라시옹>의 제라르 르포르는 이들을 가리켜 '진짜 중에서 진짜 시네아스트'라고 격찬하고 있으며, 혹자는 이들의 영화를 가리켜 '현대영화의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이들의 영화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 감독들 :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 벨기에 출신의 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은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감독으로서 이력을 시작한다. 1970년대부터 벨기에의 노동계급과 이민자 문제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이들은 1986년 <잘못된 Falsch>를 통해 극영화에 처음 뛰어들게 된다. 세 번째 극영화 <약속>(1996)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다르덴 형제는 1999년 <로제타>로 칸느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극영화 감독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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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프레시안무비 |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을 가리켜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말처럼 이들 형제의 영화적 작업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의 영화만큼이나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기로 유명하다. 아이디어 작업에서부터 영화제작과정 전반에 걸쳐 이들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개의 눈을 더 가진 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일한다. 예를 들어 촬영현장에서 한 사람은 모니터를 보고 한 사람은 배우들을 보고 있다가 잠시 후에 서로의 역할을 뒤바꾸는 방식이다. 또 한 사람이 촬영을 맡으면 한 사람은 사운드를 담당한다. 오랜 공동작업의 경험을 통해 순간순간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이지, 또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이들의 작업방식은 작고 가벼운 영화를 지향하는 이들 형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작업방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르덴 형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자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작업을 반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여벌의 두 개의 눈은 세상을 더 잘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작업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중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이후로 이처럼 완전한 동지적 결합에 의한 영화제작방식을 실천한 감독은 없었다.
. 배우 혹은 인물들 : 살아 숨쉬는 익명적 존재들 다르덴 형제에게 있어서 배우는 곧 영화 속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로셀리니가 '사물이 거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 앞에 배우가 허구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인물로서 존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들이 가진 기존의 이미지들은 그들의 작업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인물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다르덴 형제가 선택한 방법은 리허설이다. 감독과 배우만이 참여한 리허설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배우가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자신들 앞에 있다고 느껴질 때 감독은 촬영을 시작한다. 비전문배우들을 통해 의도한 인물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태도는 브레송적인 '모델'의 개념과도 유사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배우가 캐릭터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카사베츠의 '즉흥연기'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에게서 카사베츠의 인물들과 같은 숨막히는 생명력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감독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세상 바깥dehors'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다르덴 형제의 등장인물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도 존재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정당하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르덴 형제는 특정계급이나 계층의 인간이 아니라 '탈계급화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자 한다. <약속>의 밀입국 거간꾼, <로제타>의 빈민 실업자, <아들>의 소년원 출신 범죄자, <더 차일드>의 부랑아 등의 인물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이 익명의 밑바닥 인생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 형제에게 이 인물들은 타자화된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웃이며 살아있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영화에서 '카르티에-브레송이나 드와즈노의 사진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것' (장-뤽 두앙, <르 몽드>)은 바로 다르덴 형제가 그 익명적 존재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삶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연출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의 영화를 소재와 주제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다. 이런 오해는 급진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그들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극영화로 옮겨온 이후에도 그들의 영화는 여전히 급진적이다. 그들은 감히 현대영화인들이 영화적 소재로 선택하기를 꺼려하는 문제들을 자신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의식만으로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의 독창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이들의 영화는 형식면에서도 로베르 브레송이나 오즈 야스지로에 필적할만한 엄격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아들>에서 꼼꼼하게 치수를 재고 목재를 다듬던 주인공 올리비에처럼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의 영화를 면밀하고 정확하게 연출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형식적 강박증이나 탐미적 집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과 인물에 정확히 부합하는 형식을 찾아낸다. <로제타>나 <더 차일드>에서 눈길을 끄는 카메라 무브먼트가 좋은 예일 것이다. <로제타>의 첫 장면에서 보여준 카메라의 움직임을 생각해보자. 젊은 여인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카메라는 공장 복도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한다. 이 폭발적인 힘의 근원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로제타가 가진 동물같은 생명력이다. 알콜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캠핑카에서 살아가는 극빈자 로제타. 직업을 찾아 돌진하는 그녀의 생의 의지를 다르덴 형제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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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프레시안무비 |
<더 차일드>에서의 끊임없는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그 근원은 주인공 브뤼노다. 하릴없이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 브뤼노는 세상 어느 곳에도 정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부유한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이 부랑아의 불안정한 삶의 동선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형식의 근원을 인물과 소재에서 찾는 탓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정형화된 스타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새로운 소재를 선택하는 순간 이전의 영화들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제라르 르포르가 다르덴 형제를 가리켜 '진짜 중에서도 진짜 시네아스트'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 감독들이 대상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스스로의 성과들마저도 기꺼이 희생하는 드문 감독들이기 때문이다.
. 현실과 영화 : "현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리얼리티'다. 리얼리티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사물과 세상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 로셀리니의 현실인식과 흡사하다. 세상을 곡해하거나 허구적으로 치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이들의 영화적 태도는 이미 등장인물과 연출기법에 대한 소개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그들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어떤 현실에 대한 영화를 찍고 있을 때에 무엇인가 당신에게 저항하는 것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 현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의 연출이나 당신의 드라마 구성 밖에 존재하고 있으며, 당신의 프레임을 벗어나있다. 우리가 이미지를 보고, 대사를 듣지만 그것들은 부분들이며 그 바깥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
과의 2002년 인터뷰 중에서) 영화의 역사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있어서 다르덴 형제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를 '세상을 향해 열린 창'으로 인식한 앙드레 바쟁과 그의 영화적 문제의식을 계승한 파스칼 보니체를 기억한다. 또 로셀리니를 비롯한 전후의 이탈리아 감독들과 길 위에서 진실을 찾았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기억한다.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과 영화라는 표현양식을 통해 세상을 대면하는 태도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르덴 형제가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적 이상을 현재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상은 소재나 주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세상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삶 : 현실은 환상보다 풍요롭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어 '현실은 환상보다 풍요롭다'고 말한다. 다르덴 형제는 이 대문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현실적 소재와 인물에 근거를 둔 그들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이 생의 진실에 대해 단선적인 이해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다르덴 형제는 삶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생의 이면들을 추적함으로써 삶이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측면들을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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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일드 ⓒ프레시안무비 |
예를 들어 <더 차일드>의 경우, 다르덴 형제는 어느날 거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젊은 여인을 목격한다. 그들은 그 여인 옆에 아이의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벨기에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던 영아밀거래의 문제를 생각한다. 그 결과 브뤼노라는 캐릭터가 탄생한다. 이 부랑자는 누구나 아이를 사랑할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철저히 깨뜨린다.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브뤼노에게 아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그는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아이를 내다판다. 과연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자에게 우리는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로제타>에서도 주인공 로제타는 자신에게 연정을 느끼고 다가서는 리케의 일자리를 가로챈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정도로 생의 막바지에 내몰린 이 소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약속>에서는 14살 소년 이고르는 사창가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줌으로써 그녀를 돌봐달라는 그녀의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지만, 사실 이고르는 숨이 채 끊어지지도 않은 이 여인의 남편을 아버지와 함께 생매장한 공범이었다. 과연 이고르는 약속을 지킨 것일까? <아들>에서 주인공 올리비에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소년과 같은 일터에서 일하게 된다. 올리비에는 선한 의지대로 이 소년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 이처럼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결코 관습적인 방식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현실로부터 끌어낸다. . 메시지 : 삶은 계속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 드러난 현실은 대단히 엄정하고 냉혹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들은 단지 생의 비정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들의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살아라!'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들의 영화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다르덴 형제의 주인공들은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은 결코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초인적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생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삶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르완다의 여인들은 끔찍한 학살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녀들을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녀들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살아감으로써 이 비극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 삶이란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무엇입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마을에서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 '왜 이런 상황에서 축구경기를 보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계속 살아야하니까요."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풍경 역시 대지진으로 인한 폐허와 다름없다. 하지만 이 형제감독의 영화 속에는 '살아있음'이 가진 에너지와 그 힘에 대한 외경심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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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프레시안무비 |
<약속>에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생매장했다는 이고르의 고백을 들은 후에 아무 말 없이 이고르와 함께 지하도를 걸어간다. <로제타>에서 자살을 하기 위해 가스통을 끌고 캠핑카로 돌아가던 로제타는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리케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아들>에서 올리비에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소년과 함께 일터로 나간다. 이들은 결코 영웅적이지 않은 자들이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이 초라한 인간들은 진정한 주인공이 된다.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들은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질 들뢰즈는 '영화가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 믿음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상 적어도 다르덴 형제는 세상과 삶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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