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는 젊고 매력적이며 유망한 사진작가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젊은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조금은 이기적이고 조금은 오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가 병에 걸린다. 동성애자인 로맹(멜빌 푸포)은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이 아닌가 염려한다. 하지만 그의 병은 암이다. 암은 이미 그의 온 몸에 전이되었고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다. 살아날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안 로맹은 치료를 거부한다. 자존심 강한 로맹은 아무에게도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애인을 떠나보내고 가족들을 떠난다. 하지만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롯해서 주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또 한 남자가 있다. 인후염에 걸린 그는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 병상에서 그는 지난 삶을 돌아본다. 떠나버린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던 어머니의 모습 위로 헤어진 아내의 모습이 그의 회상 속에서 겹쳐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 위로 자신을 기다리며 고통받았을 아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그는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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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리브 ⓒ프레시안무비 |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 <사랑의 추억>(2000)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다루었던 프랑수아 오종은 신작 <타임 투 리브>에서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 청년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삶의 생기와 끊임없이 대비된다. 암 선고를 받고난 직후 로맹이 앉아있던 공원과 로맹이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해변에는 죽음의 공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로맹은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그의 존재를 증언해 줄 증인을 찾고자 한다. 이 행위는 로맹이 불임부부의 청을 받아들여 대리부(代理父)가 됨으로써 완결된다. 자식을 통해 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이 과정은 진부한 설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로맹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 진부한 설정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구소련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은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생의 가치와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오종의 영화와는 달리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삶은 죽음과 대비되는 가치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삶은 끝없이 순환하면서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인 인간은 이 운명의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오류를 반복하고 어머니의 고통은 아내에게서 반복된다. 이 운명의 악순환은 이 남자의 가족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난민들, 2차 대전 중 부모를 잃은 소년, 국경분쟁에 내몰린 군인들, 부상당한 상이군인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영화는 인류의 역사가 끝없는 오류의 연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죽음 앞에 선 인물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이 두 영화에서 두드러진 차이는 죽음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오종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로맹이 초연해지는 것은 죽음의 동반자가 될 할머니(잔느 모로)를 만난 이후다. 로맹은 할머니에게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밝힌다. '왜 내게만 그 사실을 말하느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로맹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 둘 다 곧 죽을 사람들이니까요." 가슴이 섬뜩할 대답이지만 할머니는 손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 밤 너와 함께 죽고 싶구나." 로맹은 죽음이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종의 주인공과 달리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홀로 남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값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오류투성이였음을 깨달았지만 그 시간들을 되돌릴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돌이킬 수 없기에 그는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고독 속에 남겨둔다. 그리고 용서받기보다는 스스로가 혹독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의 어리석은 삶을 정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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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투 리브 ⓒ프레시안무비 |
<거울>에서 죽음은 두려운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닥쳐올 결과다. 또한 어리석은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인간들은 비로소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만적인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에서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해성사와도 같은 이 과정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남자를 위해 타르코프스키가 마련한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은 자전적인 영화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헌정된 영화이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출연시키기도 하였다. <거울>이 타르코프스키의 노모에게 바쳐진 영화라면 오종의 <타임 투 리브>는 잔 모로에게 헌정된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잔 모로가 등장하는 장면은 길지 않다. 하지만 올해로 78세가 된 이 대배우의 주름투성이 손과 얼굴만큼 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둘 다 곧 죽을 사람들'이라고 로맹이 말할 때 그녀의 얼굴에는 짧은 흔들림이 나타난다. 어쩌면 그 흔들림은 실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손자를 위로한다. 이 짧은 순간에 잔 모로는 배우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이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가 잔 모로를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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