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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쟈니 캐쉬를 알아?!"

[특집] 영화 <앙코르>를 통해 본 쟈니 캐쉬의 음악세계

2003년 11월,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쟈니 캐쉬의 사망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의 나이 71세였고, 아내 준 카터가 숨진지 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술과 약물에 찌들었던 쟈니 캐쉬의 삶을 'Walk the Line(영화 <앙코르>의 원제이며 쟈니 캐쉬의 불세출의 히트곡 제목)'하게 했던 이가 동료 뮤지션이었던 준 카터였다. 준 카터는 쟈니 캐쉬의 삶을 수렁에서 건져 올렸으며 그들은 결혼 이후 35년을 생의 반려자이자 음악적 동지로 해로했다. 준 카터가 아니었다면 쟈니 캐쉬는 그저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의 초년은 불우했던 예술가들의 여느 삶처럼 짙게 드리워진 상처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는 깊이 의지했던 형을 사고로 잃었고 이 사건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작곡에서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명성과 인기를 얻으면서 술과 약물에 빠졌다. 1966년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났고 약물 중독으로 인해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 1967년쯤 약물 중독 따위로 사망했다면 아마 쟈니 캐쉬는 음악사가들로 하여금 또 하나의 요절 천재 뮤지션의 신화를 쓰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쟈니 캐쉬는 사람들이 요절한 예술가에게 던지는 애틋한 동정심이나 실제보다 지나친 평가에 불과하다는 알량한 프리미엄을 거부했다. 그는 기어코 살아 남았으며 정직하게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앙코르>는 그렇게 쟈니 캐쉬가 요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그 인생의 분기점을 그린다. 무엇보다 40번의 프로프즈 끝에 결혼을 허락했던 준 카터와의 눈물 겨운 사랑을 조명한다. .
쟈니 캐쉬 ⓒ프레시안무비
영화보다 더 영화다웠던 삶 영화는 둘의 결혼과 함께 후일담을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사실 예술가로서 쟈니 캐쉬의 삶은 그 이후가 더욱 흥미진진하다. 1955년 'cry, cry, cry'가 빌보드차트에 진입한 첫 싱글이 된 이후 'walk the line'이 43주 동안 차트에 머무르며 2000만 장이나 팔렸던 시절, 그러니까 영화에 등장하는 뮤지션으로서의 화려한 초기 경력은 그의 50년 음악 인생의 서곡에 불과하다. 쟈니 캐쉬는 남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음악에 불과했던 컨트리 뮤직을 미국 전역에서 사랑받는 음악으로 격상시킨 공로자로 인정 받는다. 보통 그의 음악은 컨트리 뮤직으로 '간편하게' 분류되기 십상이었고 쟈니 캐쉬 역시 '컨트리 뮤직의 거친 제왕(The Rough-Cut of Country Music)'이라 불렸지만 정작 그는 한 장르만의 뮤지션으로 딱지가 붙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음악은 로큰롤, 포크 뮤직, 블루그래스(애팔래치아 남동부의 켄터키 주를 중심으로 발전한 빠른 템포의 스타일로 전통적인 시골풍 민요), 블루스, 가스펠적 요소를 두루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의 음악적 탐구는 후반기로 갈수록 컨트리 뮤직의 본산이던 내쉬빌의 주류에서 멀어졌다. 엘비스 프레슬리, 로이 오비슨처럼 로큰롤 태동에도 영향을 준 뮤지션으로 평가 받았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컨트리 뮤직과 로큰롤 부문에서 동시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희귀한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쟈니 캐쉬가 불요불굴의 뮤지션이었다는 것은 옛 명성에 안주하기보다 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감행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1969년부터 2년간 ABC 방송을 통해 'Johny Cash Show'를 진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게스트를 선정해 밥 딜런, 닐 영, 루이 암스트롱 등을 무대로 불러냈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적 행보를 모색했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1990년대까지 다른 장르의 뮤지션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함께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 함께 만든 'Highway Men'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 투어 공연을 밀어붙였고, 1994년 랩 뮤직의 프로듀서로 이름이 높았던 릭 루빈과 의기투합한 뒤에는 컨트리 뮤직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기도 했다. 나인 인치 네일스, U2, 벡 등 재능있는 후배 뮤지션들의 음악 에너지를 수혈 받아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함으로써 그는 세대 간 간극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 간 벽을 깨뜨리는 데도 일조했다.
. 쟈니 캐쉬의 성공은 결국 사랑의 힘 쟈니 캐쉬는 건강 악화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1998년까지 42년 간 끊임없이 투어 공연을 다녔고, 1500여 곡을 발표했으며 1959년 이후 그의 앨범은 5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공로상을 포함해 그래미상은 11회를 수상했으며 1996년에는 눈 높은 케네디 아트 센터가 헌정 공연을 기꺼이 승인했다. 기록이 보여주듯 대중적 인기는 물론 비평적 영예까지 누렸지만 그가 이뤄낸 성취는 젊은 날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절제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 인간적 감동이 있다. 게다가 컨트리음악이 '보수적 백인 음악'이란 세간의 인식을 불식시키듯 '쟈니 캐쉬 쇼'에서는 반전 등의 사회적 이슈를 제기함으로써 집단적 관심을 환기시켰고 많은 돈을 기부해 자폐아 치료, 암환자 구호, 교도소 개혁(영화에서 보여주듯 교도소 라이브 공연으로 비틀즈를 능가하는 판매고를 올렸지만, 그는 그 혜택을 수감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 등의 사회 문제 해결에도 나섰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검은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선 "전 세계에서 고통받는 빈자와 피억압자들을 예우하고 떠올리기 위해서"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중적인 스타이자 도전하는 예술가였고, 독실한 크리스찬이자 양심적인 시민이었던 그의 인생은 이렇듯 한 치 흠도 없이 존경스러운 삶의 궤적을 그려 왔다. 물론 이것은 영화처럼 극적이었던 약물 중독과 준 카터의 사랑에 의한 갱생의 시나리오 이후부터다. 쟈니 캐쉬가 저런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표면적으론 영화 <앙코르>가 보여주듯 '사랑의 힘'이었을 것이다. 사진제공: 디어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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