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칸영화제에 나탈리 포트먼이 머리를 삭발한 채 나타나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취재진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네오 나치? 암환자? 그도 아니면 레즈비언이냐고? 이 기막힌 헤어스타일은 모두 영화를 위해서다." 물론 농담과 여유도 잊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굉장히 자유롭다." 당시 그녀의 삭발은 <스타워즈> 시리즈 이후 두번째로 도전하는 블록버스터 <브이 포 벤데타>의 이비 역을 위한 것이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테러리즘의 정치학을 SF액션으로 담아 낸 <브이 포 벤데타>에서 이비는 평범한 시민에서 테러리스트 V에 동조하는 여전사로 거듭난다. 눈부신 웨이브의 금발은 수용소에 갇혀 고문 당하는 장면에서 완전히 잘려 나간다. 육체와 정신을 모두 피폐하게 하는 고문의 고통을 이겨내고 이비는 마침내 공포를 극복하는 초월적 인간성을 경험하게 된다.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V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영화 내내 가면을 한번도 벗지 않는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 대신 삭발한 나탈리 포트먼을 간판으로 내세운다. 그 강렬한 이미지만으로도 <브이 포 벤데타>는 영화가 하고자 하는 발언을 압축적으로 전달해 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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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프레시안무비 |
지성적인 아이비리그 대학생이었던 나탈리 포트먼은 <브이 포 벤데타>에 대해 "폭력의 분류, 국가의 폭력과 개인 폭력의 차별화, 테러리즘에 대한 개념 정의 등 폭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꼼꼼한 분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치적 발언은 가급적 자제한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수동적 인물이 정치적 자각을 통해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그는 말한다. <브이 포 벤데타>는 논쟁적인 영화지만 스물다섯의 이 젊은 배우는 논쟁의 중심에 서기 보다는 배우라는 본분에 충실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정치적 발언은 좀 더 나이가 든 뒤로 미뤄도 좋을 것이다.
. 12살에 남자 꼬시는 법을 알게 된 소녀 어느덧 스물다섯을 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탈리 포트먼에게서 <레옹>의 어린 마틸다를 떠올린다. 소녀였을 때는 너무 조숙해 보여서 탈이었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도 소녀 마틸다로만 기억되니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어떤 인터뷰에서 포트먼도 이렇게 얘기했다. "그말은 내가 언제까지나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뜻인가? 그건 좋은 얘기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레옹>에서 나탈리 포트먼이 맡은 마틸다의 성적 매력은 굉장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겨우 13살에 불과했지만 도발적인 눈빛과 반항적인 몸짓의 마틸다는, 노출과 섹스신 없이도 충분히 유혹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때의 포트먼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의 1955년 소설에서 현대 액션 영화로 완벽하게 건너 뛴 살아있는 '롤리타'였다. 자신을 레옹의 '애인'이라도 다부지게 말하던 모습으로 나탈리 포트먼은 이미 그때부터 많은 남성들의 애인이 됐다. 그 뒤 애드리안 라인이 감독한 <롤리타>에 캐스팅 1순위를 오르내리게 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너무 어린 나이에 예상치 못했던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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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에 성적 대상으로 보여지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뉴스위크에는 이런 글이 실린 적도 있다. 어린 여자아이를 이런 영화에 출연하게 하다니 부모를 고소해야 한다는 둥, 애들에겐 지나치게 외설적인 영화였다는 둥. 그 모든 말들이 날 정말 당황스럽게 했다." 나탈리 포트먼은 영리하게도 대중의 은밀한 욕구에 의해 착취당하는 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고 또 성공했다. "소녀들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연기하고 싶다"면서 롤리타 역을 비롯해 성적 코드와 노출이 필요한 모든 영화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히트>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뷰티풀 걸> 그리고 <여기보다 어딘가> 등의 영화에서는 비록 조연이긴 했지만 자신의 조숙함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똑똑한 틴에이저 역을 주로 연기하려 노력했다. 많은 아역 출신 배우들이 어린 시절의 연기 생활을 회고할 때, 강요당했다거나 이용당했다는 불만을 내뱉곤 하지만 나탈리 포트먼은 달랐다. "나는 다른 애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야심에 차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나는 매우 진지한 애였다." 자칫 하이틴 스타들이 빠질 법한 인기의 달콤한 함정을 현명하게 피해갔으며 마틸다의 후폭풍도 무사히 견뎌냈다. "그 덕분에 내 섹슈얼리티를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12살에 남자 꼬시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10대의 나탈리 포트먼에게 있어 '배우'는 절대적인 인생목표가 아니었다. 스타가 돼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을 몰아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포트먼은 연기가 아닌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타가 되기보다는 더 영리해지고 싶다"던 결심대로 1999년 마침내 하버드에 진학했다. 하버드 시절, 그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5개 국어를 익혔으며 세계 오지를 여행하고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갖는 등 삶의 지평들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이 기간 나탈리 포트먼은 학업에 매진하기 위해 오로지 <스타워즈> 프리퀼 시리즈에만 출연했다. 그러나 17살부터 합류해 8년간 작업한 이 시리즈는 주로 소규모 드라마의 조역으로 출연해온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결국 나탈리 포트먼은 <스타워즈>를 통해 블록버스터 영화의 히로인으로 연착륙하게 된다. 여왕 아미달라로 분한 그는 가부키 배우처럼 하얗게 분칠한 분장, 괴이한 기모노풍의 의상과 머리 장식으로 스타워즈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탈리 포트먼 또한 첫 액션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면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연기 방식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내 경력에서 아마도 가장 도전적인 연기였다고 할 수 있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건 배우로서 준비해야 할 것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연기하는 장면과 상대 캐릭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늘 염두에 두고 조화를 고민해야 한다. 눈앞에 없는 상대 앞에서 문자 그대로 마임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아이 같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 <클로저>를 통해 꼬마에서 숙녀로 성장하다 블루스크린의 연기 이후, 그는 탄탄한 드라마와 정통 연기를 조화시킨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클로저>는 여러모로 나탈리 포트먼의 성인식 무대가 된 영화다. 상을 탔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을 졸업하며 진정한 배우의 길에 들어선 시기에 작업한 작품이었으며, 늘 원죄처럼 비교 대상이 되어야 했던 '마틸다'의 사슬을 끊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트립댄서 앨리스로 분해 지금껏 미성년의 금기 안에 가두어 두었던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섹시함을 한껏 과시하는 한편 연인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은 여자의 상처입은 내면을, 또래 배우들이 해내기 힘든 노련한 연기력으로 소화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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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먼이 빨간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하고 길거리를 걷는 첫 장면은, 영화의 인상적 삽입곡인 데미언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의 가사처럼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can't take my eyes off you).' 폭발적인 성적 매력과 끓어넘치는 연기 열정을 두루 보여준 이 영화에서 나탈리 포트먼은 늘 그를 옭아매기만 했던 마틸다의 그늘을 받아들이면서 나이에 맞게 한층 더 성숙시켰다. 단순히 노출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줬다는 면에서 <클로저>의 앨리스는 진정한 '성인'역이었다고 할 만했다. "<클로저>는 분명 'sex'에 관한 영화고 애들이 보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런 문제를 공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이제 이런 얘기 저런 얘기에 상처 받지 않는다. 이제는 다음날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사람들에게서 '그 영화에서 너 봤어. 정말 더럽더군' 같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얼마 전 SNL(Saturday Night Live) 쇼에 나와 욕설 섞인 갱스터랩 뮤직 비디오를 선보이며 사람들을 웃겨 댈 정도로 나탈리 포트먼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아 있는 배우다. 넘치는 끼를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다. 아마도 대중들 역시 나탈리 포트먼에게서 테러리즘에 대한 훈계보다는 스크린에서의 새로운 변신을 더 기대하는 편일 것이다. 지금까지 영리하게 자신의 인생과 연기 경력을 관리해 온 만큼 포트먼은 앞으로도 대중을 맹신하지도, 쉽게 허영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포트먼은 늘 즐겁게 일하려고 한다. "쉽게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내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 필요하다. 새 작품은 늘 지난 작품의 반대가 되는 걸 시도하려고 한다."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의 다음 영화는 거장 밀로스 포먼이 감독을 맡은 <고야의 유령 Goya's Ghosts>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만큼은 나탈리 포트먼의 삭발한 머리를 더 감상할 때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가 삭발한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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