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위예가 세상을 떠났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지난 일요일 저녁 해운대 바닷가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영화사에서 가장 실험적이었고 가장 급진적이었으며 가장 자유로웠던 영화감독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1936년 파리에서 태어난 다니엘 위예 감독은 영화공부를 위해 파리로 건너온 장-마리 스트로브를 만나게 된다. 메츠의 열혈 시네필 출신인 장-마리 스트로브는 다니엘 위예가 지난 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인생의 반려자이자 영화적 동지로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보다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그들의 중요 작품들 중 상당수는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영화는 단순히 한 국가의 영화사 속에 포함될 수 없는 특질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사에 유례없는 커플 감독의 영화를 영화평론가 임재철은 '유럽영화'라고 불렀다. 이 두 감독이 이처럼 유럽을 떠돌며 살게 된 것은 장-마리 스트로브가 알제리 전투 참전을 거부하면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징집거부자로 수배를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를 떠나 독일로 망명한 이들 커플은 그곳에서 하인리히 뵐의 원작을 영화화한 두 편의 영화 <마쇼르카-무프>와 <화해불가>를 발표한다. 스트로브-위예 커플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린 영화는 이들의 세번째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다. 실제 연주자들을 배우로 출연시킨 이 실험적인 음악 영화의 성공 이후 두 사람은 유럽을 오가며 <오톤>(1970), <모세와 아론>(1975), <포르티니 / 카니>(1976), <너무 일찍, 너무 늦게>(1982), <세잔느>(1989), <시칠리아>(1999)와 같은 걸작들을 남겼으며, 지난 9월 베니스 영화제에는 그들의 마지막 영화가 된 <그들과의 만남>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베니스영화제는 두 감독의 평생에 걸친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이들에게 '특별사자상'을 수여하였다. 두 감독은 건강 문제로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곧 다가올 영원한 이별의 전조였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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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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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의 사망소식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2년 전 이들을 만나기 위해 걸어갔던 로마 근교의 들판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열리는 한 영화제에 이들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 이들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이메일도,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이 살아가는 이 자유인들은 로마에서도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길섶의 풀들이 허리보다 더 높게 자란 이탈리아의 시골길에서 끝내 길을 잃고 말았다. 결국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을 넘겨서야 우리는 이 노감독들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다니엘 위예였다. 백발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에 대단히 이지적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사람들이 늘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며, 그래서 남편은 지금 우리를 찾으러 나갔다고 말해주었다. 햇볕 좋은 카페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트로브가 도착한 것은 조금 후였다. 차분한 다니엘 위예에 비해 스트로브는 사람좋은 시골 노인처럼 보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찾아 온 방문객들에게 호기심을 보였고, 먼저 한국에 다녀간 동료들을 통해서 들은 한국의 인상을 잠시 언급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그들을 한국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하자, 다니엘 위예는 차분한 말투로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먼 여행을 할 수는 없다고, 중요한 것은 영화이지 감독이 아니니까 자기 영화가 상영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대화는 기차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뜻한 이탈리아의 햇빛이 내리쬐는 시골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이들이 두 사람이면서도 한 사람인 존재라고 느꼈다. 지성과 감성, 이성과 직관, 규율과 파격이 공존하는 이들의 영화의 살아있는 모델이 내 눈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는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가 오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영화에 갇혀 삶을, 세상을 보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감독들에 대한 근심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평생 동안 자신들이 해온 작업이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것이었으며, 영화를 통해 세상을 재구축하기보다는 세상과 사물에 몸을 던진 채 그것들로부터 본질적인 것들을 끌어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철저히 허영기를 배제시킨 삶을 살면서 아무런 과장도 없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영화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가장 잘 일치시킨 감독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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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 ⓒ프레시안무비 |
우리가 또 길을 잃을 것을 염려한 두 감독은 우리를 기차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들의 차에는 이웃 농부들의 차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냄새가 배어있었다.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 두 사람은 기차표를 끊어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엘 위예는 장-마리 스트로브에게 우리를 플랫폼까지 전송해주라고 권했다. 그는 기차가 떠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마지막까지 이탈리어를 하지 못하는 우리가 염려스러웠던 스트로브는 기차가 도착하자 기관사에게 우리가 탄 기차가 로마로 가는 것인지를 확인하러갔다. 그 사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황급히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스트로브를 찾아 열차 맨 앞 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유리창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으나 그는 우리를 보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말았다.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던 그는 끝내 우리를 찾지 못하자 낙담한 듯 어깨를 살짝 떨어뜨렸다.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면서 그와 우리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나보다 생각하는 그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스트로브가 갑자기 달리는 기차를 향해 양손을 들고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차가 곡선구간으로 접어들 때까지 노인은 플랫폼에 선 채 쉬지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로마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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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만남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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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과의 대화 말미에 우리는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은 없냐고 물었다. 그때 다니엘 위예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짧게 '이탈리아의 햇빛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날의 햇빛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파리에 있었다. 그들이 함께 만든 마지막 영화 <그들과의 만남>의 개봉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프랑스 출신의 감독을 죽음의 순간에야 자신들의 품에 안은 프랑스인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니엘 위예의 죽음은 우리에겐 이중의 죽음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마리 스트로브도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리베라시옹>)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커플에 바쳐진 가장 아름다운 헌사가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덧붙임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의 DVD는 영어권에서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가 출시되었을 뿐 프랑스에서도 출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의 영화가 가장 많이 출시된 곳은 일본으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를 비롯하여, <세잔느>, <로트링겐>, <모세와 아론> 등 총 5종이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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