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의 권위주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각종 행사장이다. 행사 주인공들이 부동자세로 반듯하게 도열해 서 있으면, 소위 '내빈'이라는 사람들이 주루륵 등장해 '내빈석'에 앉는다. 이들은 대개 8월 삼복더위에도 검은 양복을 주로 입는 사람들이다. 정치 행사건, 시.도 차원의 공식 행사건, 하다못해 사회단체의 친목 행사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내빈은 대체로 시.군의원 이상의 직급을 가진 사람들로, 행사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자기 자리부터 찾는다. 혹시 자리가 준비돼 있지 않다면? 거의 사단이 난다. 경남도의 공식 행사에서는 의자의 좌석배치와 내빈소개 순서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있으면 담당자가 인사상 불이익까지 당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비화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의전준비에 배치된다.
하지만 일선 시.군의 행사에서 의전 관행을 꼼꼼하게 점검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에서 직제에 따른 순위를 작성한 '메뉴얼'까지 발행해 각종 행사 개최 시 참고용으로 배포할 정도다. 그럼에도 무슨 실수가 발생하면 시.군의 행사 담당자는 '고귀하신' 기관장이나 의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얼마 전 경남의 어느 시에선 내빈 소개 때 시의원들을 한사람씩 호명하지 않고 무더기로 소개했다는 이유로 시의원들이 행사 중에 집단 퇴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내빈들은 어떻게 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싶다.
반면에 행사의 주인공들인 참석자들은 어떤가? 식전부터 일제시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형태로 열을 맞추어 서 있어야 한다. 개회선언과 국민의례, 주최 측의 경과보고와 대회사, 공로패 증정, 또 다시 내빈들의 축사…. 가을 들판보다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허례허식을 부동자세로 지켜봐야 한다.
이들 앞에서 내빈들은 참 잔혹하다. 얼마 전 한 시 행사에서 겪은 일이다. 시장이나 시의회 의장은 자신의 성장과정과 정치적 소신, 그리고 나름의 지역 청사진까지 곁들여 핏대를 높였다. 뒤 이어 국회의원들은 국내 정치와 경제의 변화, 그리고 숙원사업 해결 등에 대해 역설했다. 그 뒤 경찰서장과 교육장은 당부말씀 비슷한 축사를 했다. 이쯤 되니 참석자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말씀 순서'는 끝날 줄 몰랐다. 내빈 축사가 끝나니 "도의원도 한 말씀 하라"면서 필자에게 마이크를 권했다. 세상에나…. 손사래를 치다 마지못해 등단해서 "여러분, 간단히 하겠습니다. 오늘 행복하십시오"라고 인사하고 내려왔다. 많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축사를 짧게 해 주어 고맙다"는 뜻인 그 박수는 받아도 개운치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필자 뒤로 7~8차례의 격려사가 같은 내용의 말잔치로 쭉 이어졌다.
아무리 좋은 꽃노래도 세 번이면 족한 법이다. 필자조차 내빈들의 자기자랑을 듣다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데, 연단 앞에 도열한 주인공들은 어땠을까? 땡볕 운동장에 1시간 반 동안 부동자세로 선 채로 텐트 그늘 아래서 목청을 높이는 '높으신 분들'을 보는 그 분들 말이다. 한 눈에 봐도 파김치가 된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해 일이다. 어느 시의 '시민의 날' 개회식 행사 도중에 1시간 반동안 내리쬐는 땡볕을 견디지 못해 쓰러진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다음날 지역신문과 시청 홈페이지에는 난리법석이 났다. 행사시간이 너무 길었고, 축사가 너무 많았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친 것이다.
당시 시 측은 "개선하겠다"고 했었다. 올해엔 달라진 게 있긴 했다. 시장님의 특별한 배려(?)로 참석자들은 운동장에 '앉아서' 식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식 중간에 쓰러지는 사람은 올해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최근 한 사회단체의 행사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선 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내빈들을 수두룩하게 초대해 놓고는 40명 정도밖에 안되는 참석자들끼리 1시간 동안이나 상을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이번엔 초대받은 쪽에서 "와, 진짜 너무하네. 이럴 것 같으면 뭐 하러 오라 했노"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빈도, 참석자도 흔쾌하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안 되는 것일까? 만약 주최 측이 '기관장들이 줄지어 참석해야 체면이 서고 행사가 빛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내빈들이 '일장연설을 해야만 뭔가 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떨까? 두 가지 모두 불필요한 권위의식의 발로인 만큼 버려도 될 듯한데 말이다.
이솝 우화의 '학과 여우' 이야기도 떠오른다. 조금만 상대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동원된 관제 행사'가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축제로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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