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의 <타짜>는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영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허영만의 동명만화 가운데 1부를 각색한 이 영화는 인물설정이나 주요 에피소드와 같은 큰 줄기는 원작을 따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작의 색채를 지우는 데 더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영화다. 감독은 한국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원작의 무대를 현대로 옮겨옴으로써 일종의 동시대성을 영화 속에 끌어들이려 한다. 또한 고니라는 전설적인 도박사의 일대기 형식을 띈 원작과는 달리 조연들의 비중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영화를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각축장으로 변화시킨다. 시각적인 스타일에서 있어서도 사실주의 극화에 가까운 원작과는 달리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최근 한국영화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댄디즘적 경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각색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허영만의 원작보다는 최동훈의 전작 <범죄의 재구성>에 더 가까운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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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달John Dahl감독의 1998년도 영화인 <라운더스Rounders> 역시 전문적인 도박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상습도박꾼'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라운더스>의 주인공은 프로도박사에 버금가는 포커 실력을 가진 법대생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마이크는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심리 분석으로 전문적인 도박사들로부터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다.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세계 포커대회에 참가할 밑천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계 마피아인 KGB(존 말코비치)와 승부를 벌이다가 등록금과 생활비를 고스란히 날려버린 마이크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친구 웜 (에드워드 노튼)이 출옥하면서 마이크의 인생은 또 한번 소용돌이를 맞게 된다. 정공법을 즐기는 마이크와 달리 웜은 그 별명이 말해주듯 속임수 쓰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는 막장 인생을 사는 인간이다. 웜의 등장으로 인해 마이크는 동거하던 애인을 잃게 될뿐만 아니라 웜이 진 빚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 결국 마이크는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이 스승에게 빌린 10,000달러를 밑천으로 KGB와 생명을 담보로 한 포커 게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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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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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의 <타짜>와 존 달의 <라운더스>는 모두 타고난 도박꾼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영화의 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영화만으로 보면 최동훈 감독은 이기는 승부보다는 멋진 승부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도박이란 일종의 속임수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노련한 자, 아무리 명석한 자라도 타짜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승부를 조작하면서도 그들에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승부에 이김으로써 과정의 불순함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동훈 감독은 자기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치사한 속임수를 쓰기보다는 정공법을 선택한다. 물론 감독 역시 승부에서 이기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멋진' 승리다. 전작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치열한 두뇌싸움과 호기있는 배팅을 통해 판 전체를 지배하면서 두고두고 기억될 '멋진' 승부를 연출하고자 한다. 인물이나 사건은 장기판의 말이나 도박판의 카드처럼 멋진 승부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가 되고, 화려한 화면은 휘황찬란한 카지노의 외양처럼 게임의 맛을 더해주는 장식이 된다. 이 영화가 '도박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타짜의 스태키 기술이 발휘된 한 판의 게임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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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더스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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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더스>는 <타짜>에 비하면 소박한 영화다. 도박영화에 꽤 어울리는 주연배우들을 제외하면 별달리 멋을 부린 흔적도 없고 메시지도 상식적인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에도 도박영화다운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카지노의 분위기나 적당한 시점에 등장하는 일종의 도박판의 격언들은 도박영화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흘러가면서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팅>과 같은 고전적인 도박영화들이 끊임없는 반전을 통해 관객을 도박판으로 끌어들이는 반면 이 영화는 점점 관객을 도박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협잡꾼 웜의 등장 이후 점점 나락으로 치닫던 마이크는 마지막 승부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가 그 승리를 통해 얻어낸 것은 원래 그가 있던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6만불짜리 승부에서 이겼지만 결국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맨 처음 그가 가지고 있었던 3만불이었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던가!'하고 회환에 찬 고백을 했던 브레송의 <소매치기>의 주인공처럼 <라운더스>의 마이크 역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한 승부에 임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가 이런 미래를 미리 알았다면 그는 애초의 승부를 멈출 수 있었을까? <타짜>보다 앞서 발표된 허영만의 또 다른 도박 만화 <48 + 1>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화투는 모두 48장!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또 1장의 화투가 있다!" 이만큼 인간이 화투패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 인간을 도박판으로 내모는 것은 손에 쥔 패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이 한 장의 패다. 그 패만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만 그 패는 처음부터 형체가 없는 것이었던 만큼 결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환상의 패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손목과 한쪽 귀를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인생을 저당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 패가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쉽사리 그 패의 유혹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허영만의 만화에서 주인공 고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두 번 죽었다. 도박을 배우기 위해 한번 죽었고, 도박을 끊기 위해 또 한 번 죽었다"고. 최동훈의 <타짜>는 묘하게도 도박의 집요한 유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고니는 햇살 좋은 해변에서 기분 좋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은 최동훈이 '설계'한 멋진 게임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멋진 게임이 끝나는 순간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의 스태키 기술이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여기서 게임 이상의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만일 그에게서 '설계'된 게임이 아니라 '실화'를 원한다면 그것은 무리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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