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안방극장'이라는 타이틀답게 많은 시청자들을 울고 웃기며 우리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다. 또 시대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과거 가난한 집에 태어나 서울로 상경해 대기업에 취직해 성공가도를 달리는 '대기업 기획실장'이 드라마 주인공의 단골 배역이었다면, 최근에는 스카우트된 유학파 실력자나 재벌2세, 의사들이 드라마의 단골 배역이 됐다. 요즘은 '동성애' 코드를 얘기하는 것도 스스럼 없어졌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작품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지만, 드라마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이에 <프레시안>은 앞으로 드라마와 관련한 칼럼을 자주 소개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거침없이 하이킥>을 도마에 올렸다. 첫 번째 순서를 맡은 이정흠 씨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했으며, '20대 여성의 텔리비전 드라마 수용과 일상적 실천'이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특히 MBC와 방송문화진흥회가 주최하는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을 세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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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개월 동안, 집에 붙어있는 날 저녁 시간이면 어김없이 "창공을 향해 날려, 하이킥~ 하이킥~" 노랫소리를 들으며 습관적으로 TV 앞에 앉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이순재 원장' 식구들과 범이, 유미 등의 '객식구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우울해진다.
솔직한 고백을 먼저 하겠다. 나는 <거침없이 하이킥> '빠'이다. 20%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빠'라는 고백은 새삼스럽지도 별스럽지도 않을 테다. 시작부터 '빠'임을 실토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비판을 위한 보험이라고 해두자.
<거침없이 하이킥>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김병욱 PD라는 이름 석 자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으로 브라운관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한 인물이다. 당연히 골수 시청자 팬들도 많다. '인간사에 대한 의뭉스런 풍자'라고 정의되곤 하는 '김병욱표 시트콤'이라는 조어까지 만들어낸 시트콤의 대가이다.
"순풍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대학 시절 한 강사가 뜬금없이 "<순풍 산부인과>에는 인생의 모든 게 들어있다. '순풍'을 보지 않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웬 헛소리인가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발동했고, <순풍 산부인과>를 보자마자 그 재미에 빠져들었다. <순풍 산부인과>는 아직도 김병욱 PD의 최고 작품이라는 평가를 종종 받곤 한다. <순풍 산부인과>에는 '김병욱표 시트콤'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병욱표 시트콤'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사를 천연덕스럽게 '관찰'하고 '묘사'한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종종 인간 행태의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고 거기에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순풍 산부인과>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지만 좀처럼 TV가 보여주기는 꺼려하는, 잡스러운 것들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소심함, 쪼잔함이 에피타이저라면 권력욕, 이기주의 등이 메인 요리로 차려진다. 시청자들은 일상에서 흔하게 목격하는 평범한 소재들의 강도 높은 묘사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 웃음 속에서 인간사 약육강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시청자는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병욱표 시트콤'은 여느 다른 시트콤과 구별된다. 그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추하고 보기 불편해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 삶에 대한 성찰을 찾아낼지, 아니면 그저 웃음으로 끝낼지는 보는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김병욱표 시트콤'은 적어도 그런 기회를 제공해왔다. <순풍 산부인과>, <왠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같은 시트콤은 인간세상에 확고히 발을 디디고 있었기에 빛이 났다.
'김병욱표 시트콤'…서로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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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은 분명 <순풍…>과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순재를 정점으로 이뤄진 이 씨네 대가족은 인간사의 축소판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기본 구도는 <순풍…>처럼 먹이사슬로 이뤄진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하지만 <순풍…>이나 <거침없이 하이킥>의 먹이사슬이 재미있는 이유는 '절대 강자'가 없다는 점이다.
순재는 가부장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의사로서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며느리 해미에게 가볍게 제압당한다. 또 모든 사람을 자기 페이스로 몰아넣는데 능한 해미지만, '마이 페이스'를 고수하는 시동생 민용에게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절대 강자 없는 약육강식'은 <순풍…>에서 사위 영규가 언제나 장인에게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장인을 골탕 먹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던 것처럼 '김병욱표 시트콤'의 상징이다. 인간사 약육강식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절대적 권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가부장적 권위는 언제나 공고해보이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순재가 '우량주' 폴더 가득한 야동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공고해 보이던 권위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권위의 해체를 보여주는 만큼이나 <거침없이 하이킥>은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위선'을 사람들에게 들이댄다. 당신 자신에게 솔직하게, 당당하게 살라고 이야기한다. 답답한 세상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위선적인 태도를 거침없이 깨부수라고 권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며 일상 속에 내재한 우리의 위선과 가식을 인식하기도 한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순풍…>의 사회 세태 풍자 업그레이드 판이기도 하다. 김병욱PD가 묘사하는 세상은 내가,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이다. <순풍> 때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은 많이 바뀌었다. 사실상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한의사 며느리 해미, 시댁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이혼녀 신지, '인생 한방'을 노리며 주식 투자를 하는 백수 준하는 변화한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캐릭터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이러한 인간 군상의 변화들도 민감하게 포착하고 캐릭터화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하이킥>은 <순풍…>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 있었다. 하지만 몇몇 매체에서 '시트콤의 진화'라고까지 칭한 '드라마투르기'(Dramatrugy. 극작술)의 기교가 더해지면서 이 별난 시트콤은 이전의 '김병욱표 시트콤'과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는다.
지나친 '드라마적 기교'가 개성을 갉아먹진 않았나
<거침없이 하이킥>은 미스터리, 액션, 멜로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160회 이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길'을 만들려고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드라마트루기'를 통해 '길'을 만들면서 이 시트콤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에 직면했다. 결말이 없는 일상에 결말을 보여줘야 하는 강박에 시달렸다.
나는 '하이킥 빠'로서 <거침없이 하이킥>의 드라마에 일희일비했다. 서 선생과 이 선생이 끝내 갈라서는 순간 쌍욕을 토해냈으며, 유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거침없이 하이킥>의 드라마는 나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고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과 재미와는 별개로 아쉬움과 박탈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백수지만 '인생 한방'을 꿈꾸는 준하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고, 언제나 힘없이 순종해야 하는 문희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해온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 총련계 이중 스파이(유미 아빠)가 개입하고 국정원 요원을 혼자서 때려눕히는 고교생(윤호)이 등장하거나, 친구(신지) 애인인 이혼남(민용)과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선생(민정)의 신파적 멜로가 부상하며, <거침없이 하이킥>은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빼앗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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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계가 저 멀리 사라지며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완결성'에 대한 강박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항상 결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떤 완결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습관적' 행동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민호가 범이를 시도 때도 없이 끌어안는 행동에 대해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침없이 하이킥>은 '음이온을 내뿜는' 범이를 만들어냄으로써 이 청춘들의 열렬한 포옹에 끝내 '과학적'인 설명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완결성을 만들어냈다.
이 에피소드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행보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우리의 일상을 그리던 현실적 시트콤을 완결성이 필요한 가상의 세계로 스스로를 날려버렸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구현하던 우리의 일상은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거침없이 하이킥>은 재미있지만 어딘가 허전하다. 나는 <순풍 산부인과>의 미달이가 그립다. 미달이는 땍땍거리고 영악하고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우리의 일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달이가 보고 싶다.
잘 생기고 싸움도 잘하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한글 철자조차 못 쓸 정도로 공부도 못해 정이 갔던 윤호는 어느 순간 스파이들을 때려눕히고 선생님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근사한' 청년이 돼버렸다. 이건 마치 같이 꿈을 이루자고 손잡고 나아가던 내 옆의 동지가 어느 순간 대기업에 취직해 "세상, 돈이 최고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뒤 윤호가 미달이처럼 그리울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실험…식상한 장치…또 다른 기대
<거침없이 하이킥>은 분명 기존 시트콤을 넘어서는 형식적 실험을 하였고 이는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학생과 선생님이 사랑하고, 스파이가 활개 치는 이야기들은 세상에 너무 흔하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우리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면, 그것은 정말 최상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무리한 드라마적 완결을 향한 질주 과정에서 우리의 일상은 어느 순간 길 밖으로 튕겨져 버렸다. 이 튕겨져 버린 일상을 드라마 속에 다시 삽입하고 조화시키는 것, 아마도 '김병욱표 시트콤'이라는 용어가 지속 가능할 것인가의 여부는 여기에 달려있을 것이다.
약간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하이킥 빠'이다. 여전히 우리의 위선적 일상을 꼬집어내고 낄낄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9개월 동안 그 허기진 이야기에 대한 갈망을 알토란 같이 채워주었다.
이제는 <거침없이 하이킥>과 이별할 때다.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이 이별의 순간은 김병욱PD가 <거침없이 하이킥>을 밟고 올라서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또 어떤 시트콤이 나올지, '시트콤 대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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