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 속 박인순(김현주 분)의 삶은 속된 말로 답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전과자다. 그것이 사고였든 과실치사였든, 살인 전과를 안고 7년을 복역한 전과자다. 그녀가 아무리 빛나는 외모와 착한 마음씨를 지녔더라도 가슴에 새겨진 '별'은 행복해질 때쯤 어김없이 어두운 빛을 낸다. <인순이는 예쁘다>의 인순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판을 치는 한국의 드라마에서도 가장 '암울한' 주인공이다.
'암울한 주인공' 박인순
<인순이는 예쁘다>를 연출한 표민수 PD는 한 때 작품성 높은 '한 자릿수 시청률' 드라마 전문 연출가였다. 그러나 프리랜서 선언을 한 뒤, <풀 하우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등의 히트작을 만들고 텔레비전 광고에도 출연했던 표민수 PD에게 <인순이는 예쁘다>의 계속되는 한 자릿수 시청률은 오랜만의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드라마 팬들에게 가슴 아프지만 따뜻하고, 슬프지만 웃긴, <인순이는 예쁘다>는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같은 옛 걸작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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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민수 PD의 과거 걸작들은 애절한 감정 속에서도 그것을 과장하지 않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인순이는 예쁘다> 역시 그 연장선에 놓여있다. 살인 전과자 주인공. 기존의 드라마는 상상조차 못한 부담스럽고 비극적인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순이는 예쁘다>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인순이가 이십여 년 만에 자신을 버린 연극배우 엄마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감정을 고양시키는 배경음악과 함께 인순이는 엉엉 울며 엄마에게 다가간다. 모녀 상봉의 극적인 순간 배경음악은 늘어진 테이프 소리를 내고 인순이가 엄마로 착각한 인물은 생뚱맞은 표정으로 "이선영씨는 다음 공연인데요"라고 말한다. 감정이 격해질 무렵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머와 긴장의 이완은 <인순이는 예쁘다>가 소재의 무거움에 눌리는 것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태도는 이 드라마가 사회의 편견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우리 사회 편견에 대해 잔뜩 힘주어 비판하지 않는다. 인순이를 '전과자'라 차별하다 '지하철녀'로 스타로 만들고 '거짓말쟁이 전과자'로 추락시켰다 '불쌍한 인순이'로 다시 들어 올리는 사회를 그저 '보여줄 뿐'이다.
"할머니, 난 이번엔 온 나라의 불쌍한 인순이가 됐어요. 한 때는 죄인이었고, 또 한 때는 우리 사회의 쓰레기였고, 내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국민의 영웅이었고, 네티즌이라는 익명성 속에 보장된 욕망의 신기루였고, 우리 사회의 희망이기도 했고, 뻔뻔스러운 살인자, 거짓말쟁이이기도 했던, 나는, 나는 도대체 누군가요, 할머니."
인순이의 서글픈 독백을 통해 마주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쉽게 끓었다 식는 '냄비 근성'의 결정판이다. 모 아니면 도가 판을 치는 이 사회는 필요에 따라 잣대를 마구 바꿔댄다. 특히, 인순이가 '쓰레기', '불쌍한 인순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사회적 소수자들은 끓는 냄비 속에서 마구 휘저어진다.
이주 노동자는 '더럽고 위험한 인간'이거나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만 반복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성적 소수자는 '신의 섭리를 거스른 사람'이거나 '트렌드 리더'이다. 그들이 자기 욕망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사회적 소수자들 역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능동적 주체라는 것을, 그들 역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주체라는 것을, 이 사회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순이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인순이 엄마가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다 알아. 나만 믿어"를 반복하는 것처럼.
'냄비사회'에서 휘저어지는 사회적 소수자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웬만한 사람은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름의 삶을 살아오며 머릿속과 몸에 각인된 생각과 행동은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평소 '살인자도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생각했더라도, 막상 살인 전과자를 대면하는 순간 몸이 움찔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는데 선수인 상우(김민준 분)가 "전과자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우리 사회의 서글프지만 '평범한' 현실이다.
오히려 편견의 문제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인정하는 것이다. '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야. 난 편견이 없어. 난 순수해. 난 훌륭해'라는 자기 긍정은 "난 착해. 난 예뻐. 난 사랑스러워. 난 훌륭해"라는 인순이의 독백만큼이나 현실에서 별 도움이 안된다. 차라리 "젠장,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을까요"라는 솔직한 물음이 "할머니,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요"라는 인순이의 절망 섞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출발점에 더 가깝다. 상우가 자신을 '속물'이라 인정하는 순간 인순이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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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는 예쁘다>는 편견에 대한 인정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고 화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드라마 속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방송 나와서 온갖 좋은 사람인 척은 다 하더니 진짜 무지 가증스럽다"고 비난하다 "너무 불쌍해요. 힘내요"라고 돌변하는 모습은 익숙한 내 모습이다. 이런 드라마 속 인물을 비난하다 내 안에 있던 편견을 명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편견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고정된 잣대 속에 놓여있던 인순이는 훨씬 다채로운 사람으로 다가온다. 살인자이지만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사고였다고 모두가 위로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그 사랑 받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인순이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차별할 이유도 차별당할 이유도 없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 말이다. 그녀는 그저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고 싶어 할 뿐이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방해할 어떤 권리도 없다.
당신은 인순이와 다른가
이 드라마의 전개는 무척 빠르다. 한 사건으로 갈등을 두 번 세 번씩 끌며 집요하게 확대 재생산 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인순이를 사랑하는 상우나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엄마(나영희 분)가 그녀의 전과를 아는 데 한두 회면 충분하다. 비밀처럼 보였던 근수(이완 분)와 인순이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그녀의 '비밀'을 가지고 시간을 끌며 갈등을 보여줄 시간에 다른 것을 한다. 드라마가 공들이는 것은 인순이가 원하는 것, 그리고 말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 자기변호 한 번 제대로 못한 인순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인순이는 예쁘다>에 유난히 독백이 많은 이유이다. 이 '시대착오'적인 드라마는 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하기 바쁜 사회와 점점 남에게 무심해지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떻겠냐고 질문한다. 이것이 이 시청률 낮은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최고의 미덕이다.
이 드라마는 인순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갑작스럽게 피해자 가족의 용서를 보여준다. 피해자 가족은 그녀를 용서하고 "밝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며 사세요"라는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이야기 전개상의 무리수를 감수하고서라도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귀 기울여 마이너리티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이어지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는 따뜻한 세상 말이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 세상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회에 대한 애틋한 바람을 드러낸다.
난도질 당한 차별금지법
하지만 이 애틋함은 텔레비전 바깥으로 나오며 곧 서글픔으로 변한다. 사람이 사람을 편견 속에 차별하고 '심판'하는 게 얼마나 심했던지 우리 사회는 '차별금지법'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정작용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힌 사회는 강제로 편견과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 예정이다. 하지만 인순이는 결국 그 법의 보호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차별금지 범위 항목에서 범죄 전력 및 보호처분은 삭제되었다. 온갖 사회적 이익의 충돌 속에 애초의 차별금지법은 난도질당했다.
지하철역에서 삶을 포기하기 위해 서성이는 세상의 수많은 인순이들은 어떻게 될까. 법과 제도가 보호해주지 않는 인순이를 위해서라도 잠시 멈춰 서서 그녀에게 귀 기울이고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자. 드라마 속 인순이가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그녀를 불러주는 사람들의 다정한 목소리임을 기억하면서. 편견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를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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