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의 상영작들은 1981년작에서 최신작까지 다양한 일본영화들을 통해 현재 일본의 모습을 반영한다. 프레시안은 매일매일 상영작들에 대해 프레시안무비 오동진 편집장이 쓴 리뷰를 전날 미리 게재한다. 14일(내일) 상영될 6편의 영화들의 리뷰를 모았다. |
. 국도20호선 감독 도미타 카츠야
주연 이토 히토시, 리미, 다카노 츠요시 세상이 같은 고민에 빠져 있으며 같은 좌절을 겪고 있음을 알고 싶으면 어느 나라에서든 그 안의 젊은이들을 찾으면 된다. 젊음의 고통은 다들 일종의 성장통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짓누르고 있는지, 그 시대적 화두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에서 과연 미래비전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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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20호선 |
'국도 20호선'은 일본 중앙부를 동서로 잇는 도로다. 동과 서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졌다는 건 그만큼 그 사이사이에 '돈벌이'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그래서 일종의 욕망의 도로다. 때론 그 욕망을 실현시키는 '길'이 되겠지만 모든 것에 실패하고 힘없이 돌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줄곧 국도 20호선 주변의 스산하고 무의미한 풍광을 보여주는 영화 <국도20호선>은 이 도로가 통과하는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꿈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덧없는 일상을 뒤좇는 얘기다. 주인공 히사시와 준코는 동거 중인 연인이다. 하지만 이미 끝난 사이나 다름이 없다. 서로에게 애정이 식어버린 두 사람은 파칭코에서 시간을 죽이며 살아간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파칭코에서 돈을 벌 수 있는가 뿐이다. 땀 흘리는 노동은 이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어느 날 히사시는 사채업자 밑에서 일하는 친구 오자와로부터 도산한 골프용품 가게에서 골프세트를 싸게 사들인 다음 되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귀가 솔깃해진다. <국도20호선>은 어쩌면 우리들 얘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국도변의 풍경은 그대로 한국으로 옮겨 놓는다 하더라도 극히 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우리와 비슷하다.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넓은 도로 양 옆에는 요란스런 네온사인 장식의 유흥업소와 모텔이 있다. 우리도 그렇다. 중간중간엔 대형 슈퍼마켓이 가득 들어서 있다. 자본의 욕망이란 어디나 비슷하다. 무엇보다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히사시와 준코, 오자와 역시 우리의 어느 곳, 혹은 어느 나라의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젊은이들이다. 청춘들이 꿈을 잃은 것,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케 만든 것은 세상 어느 곳이나 다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과거의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전쟁이라는 크나 큰 트라우마가 만들었다면 지금의 '뉴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순전히 '자본의 문제'가 만들어 냈다. 하기사 돈은 늘 더 큰 전쟁을 일으킨다. 아니, 모든 전쟁은 돈 때문이다. 도미타 카츠야 감독의 영화 <국도20호선>이 일본적 특수성보다는 일반성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떤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찰라적 욕망만 채우며 살아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의 모습은 마치 임상수 감독의 <눈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비주얼적인 면에서는 훨씬 덜 자극적이다. 그들에겐 모든 게 그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일 뿐이며 감정적 폭발이나 극단적인 행동을 할 일도 별로 없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히사시의 나른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로 뒤좇는 <국도20호선>는 그래서 더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사시와 준코가 본드를 흡입한 후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몸과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은 진짜처럼 보일 정도다. 진짜가 아니었을까. 글쎄? 영화는,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한 것이냐고 묻는다. 중요한 것은 정말 따로 있기 때문이다.
. 다이브 감독 구마자와 나오토
주연 하야시 켄토, 이케마츠 소우스케 배우든 감독이든 이번 영화제에는 숨은 보석들이 즐비하지만 이 영화 <다이브>를 만든 구마자와 나오토는 떠오르는 신예 감독 가운데 감각적인 영상미학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국내에 개봉됐던 <도쿄 느와르>는 제마냥 느와르의 음울하면서도 또 때론 다소 음탕하고 질펀한 검은 밤의 느낌이 잘 살아있던 작품이었다. 나오토 감독은 마치 큰 스케치북에 그렇게 많은 색감을 집어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색의 콘트라스트를 양껏 펼쳐보이는 화가처럼 느껴진다. 이번 영화 <다이브>는 특히 그런 작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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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
<다이브>는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이 영화는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혼신을 힘을 다하는 중학교 다이빙 선수 세 명의 얘기를 그린다. 세 명이 겪는 우여곡절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진부한데(이런 류의 스포츠영화가 진부하지 않고 복잡하면 오히려 보는 사람들이 피곤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까?) 이 영화의 가치는 주인공 아이들이 다이빙대에서 힘차게 솟구칠 때 보여지는 전경의 모습에서 찾아진다. 학교 야외 풀에 뛰어드는 아이들의 뒤로는 때론 푸른 하늘이, 때론 아름다운 석양이, 또 때로는 학교 밖의 심드렁한 일상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 배경을 뒤로 공중에서 세 바퀴, 네 바퀴 회전을 하는 주인공 청소년들의 모습은 마치 용이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 명 가운데 보다 주인공격인 토모키(하야시 겐토)는 초등학생 때 같은 나이의 친구 요우이치(이게마츠 소우스케)가 다이빙을 하는 모습에 매료돼 자신도 선수가 된다. 나중에 고백하거니와 토모키는 요우이치의 그때 모습에서 용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다이빙 선수들이지만 훈련은 혹독하다. 전국대회를 거쳐 베이징 올림픽 출전선수를 가리기 때문이다. 토모키와 요우이치는 다이빙 선수 가문의 아이인 시부카(미조바타 준페이)와 치열한 삼각 경쟁을 벌인다. 세 명의 중학생 캐릭터가 겪는 에피소드를 비교적 균등하게 분할해 놓고 있긴 하지만 구마자와 나오키 감독의 시선은 보다 토모키 쪽으로 쏠려 있다. 토모키는 요우이치처럼 아버지를 코치로 둔 아이도 아니고 시부카처럼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다이빙 선수 소리를 들었던 친구도 아니다. 토모키는 다이빙이 좋아 그저 열심히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평범한 운동선수일 뿐이다. 하지만 스포츠계에서든 인생에서든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전환되기까지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이 경주돼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나오키 감독이 토모키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 결국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2등 인생이 1등 인생이 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토모키에게도 비범함이 숨어있다. 특이하게도 이 남자아이를 가르치는 다이빙 멘토는 여자 코치 아사키 가요코인데 그녀는 토모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말야. 네가 잘 모르는 매직 아이를 가졌어." 처음엔 이 얘기가 선생이 학생을 유혹하는 느낌이어서 살짝 몸이 더워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아사키 선생이 토모토의 눈을 보며 '매직 아이'라고 얘기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그 설명을 듣고 실망하지 않기를. 뭐가 어떻든 토모키 역을 맡은 하야시 겐토의 눈은 정말 매직 아이처럼 예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상영은 국내 청소년 관객들에게 또 한 명의 아이돌 스타가 탄생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 감독 나가사키 슈운이치
주연 서치 파커, 타카하시 마유 제목만으로 <블레어 윗치>같은 호러물이 생각들 나시는가. 하지만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는 전혀 다른 영화다. 일어 제목이 너무 직설적으로 붙어있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서구의 마녀가 건너와서 동방의 마녀로 죽다'. 뭐 대충 이런 뜻이다. 이쯤 되면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설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나시키 카호가 쓴 소설은 아동문학이라는 장르를 넘어서서 각종의 문학상을 휩쓸며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하기사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그것이 문학이든 만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작품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삶의 진실이 늘 담겨져 있는 법이다. 아동문학은 아동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전 연령층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종종 상당히 '컨템포러리(동시대적)'하다.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가 모든 사람들, 특히 기성세대가 볼 수 있는 작품으로 '확장'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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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마녀가 죽었다 |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는 올해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가운데에서 가장 누선을 자극할, 아마도 극 후반부쯤에는 모두를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릴 작품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꽤나 잔잔한 속도로 일상의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펑펑 눈물을 쏟게 된다. 어머니의 얘기,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인 할머니의 얘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는 데 있어 눈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중학교에 다니는 마이는 어느 날 학교에 가기를 거부한다. 마이는 어머니에게 특별한 이유,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마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마이는 사실, 매우 어른스럽게도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있는데 (학교라는 조직이 아니라 '학생 사회'라는 자신들의 커뮤니티가) 집단의 규율을 요구하며 그 안에 편입되지 않는 사람에게 얼마나 심한 대우를 하는지, 그런 숨막히는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엄마는 마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를 잠시 자신의 어머니 집에 맡기기로 한다. 도쿄에서 동북부에 있는, 자연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야마나시 현에 있는 할머니의 집에서 마이는 새롭게 거듭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잉글랜드에서 건너 온 마녀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진짜 마녀일까. 그건 뭐,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인상만으로는 마녀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마녀란, 이상한 방울 모자에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이미지의 악녀가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 속 마녀 집안 출신이라는 할머니는 일종의 포츈텔러, 곧 미래를 내다보는 점잖은 점쟁이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일본에서 영어선생님을 하다가 같은 학교 과학교사였던 할아버지와 결혼해일본사람보다 더 일본사람이 돼버린 '할머니 마녀'는, 마이에게 새롭게 힘을 내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 그건 매우 자연친화적이고(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마이와 함께 산딸기 잼을 만든다), 또 요즘 흔히들 얘기하는 '대안학교'적인 모습인데(할머니는 늘 대화를 통해 마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그게 꽤나 매력적인 방식이어서 우리 아이들도 저 마녀에게 맡겼으면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결국 '지극한 모성애에 대한 향수'다. 늘 마음 속에 담고 살아가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이 영화 안에 절절히 담겨져 있다. 나이 많은 관객들조차 영화를 보다가 큰 소리로 울고 싶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엔 남성들의 역할이 작고, 또 적다. 남자들이 아예 부재(不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남성성의 부재가 오히려 기묘하게도 편안함을 준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마이에게로 이어지는 3대의 사랑과 갈등은 마치 우리의 인류사가 사실은 모성성에 의해 이어져 왔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기사 오랜 세월동안 남자들이 한 일이라곤 전쟁밖에 더 있겠는가.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눈물을 흩뿌리며 고향으로 급하게 차를 몬다. 엄마의 눈물처럼, 차창 밖으로는 비가 내린다. 앞만 바라보며 차를 몰던 엄마가 마이에게 갑자기 툭 내뱉는다. "네 할머니는 진짜 마녀였어." 맞다. 마이의 할머니는 딸과 손녀의 미래를 내다보는 마녀였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엄마와 할머니도 모두도 마녀였다! 다만 우리가 그걸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 이웃 13호 감독 이노우에 야스오
주연 나카무라 시도우, 오구리 슌 폐쇄된 공간에서 피부가 끔찍하게 일그러진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절규한다. 초등학교에서는 한 소년이 동급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아이들은 소년에게 염산을 뿌리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낄낄댄다. <이웃 13호>는 시작부터 이 영화가 섬뜩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음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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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13호 |
화면은 낡은 연립주택 13호에 홀로 사는 청년 무라사키 주조가 건설현장에 노무자로 취직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소극적인 성격과 보잘것없는 체력을 가진 무라사키는 거친 사내들의 일터인 건설현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이곳에서 아카이 토루란 사내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폭행을 당한다. 무라사키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친절한 사람은 직장 동료 세키와 이웃집 23호에 사는 젊은 주부뿐이다. 젊은 주부가 아이와 남편과 외출한 후 무라사키는 몰래 23호에 침입한다. 집안에서 여자의 속옷을 뒤지는가 하면 도청장치를 설치하기까지 한다. 그러던 그는 방안 구석에 놓인 졸업앨범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자신이 어린시절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바로 그 제5초등학교의 앨범이다. 무라사키는 왜 남의 집에 침입한 것일까, 이 앨범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 주인과 무라사키는 과연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는 것일까. 무라사키는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주변을 늘 맴도는 건장한 체구에 살기어린 표정의 얼굴을 가진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웃 13호>는 학교 이지메와 폭력, 히키코모리(사회생활을 포기하고 홀로 집안에만 은거하며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정신적 상처로 인한 자아 분열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 무라사키가 10년 세월을 기다려 마침내 어린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한 남학생에게 끔찍한 복수를 감행하는 과정을 그리는 한편 한 남자의 철저하게 파괴된 내면세계를 처절하게 드러낸다. <이웃 13호>는 인기 만화가 이노우에 산타가 93년부터 4년간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발표해 큰 인기와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동명 장편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영화는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로 일관하면서 일부 관객들에겐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폭력적인 장면들을 적잖게 출몰시킨다. 하지만 그 폭력의 내면엔 고독과 고통 속에 내던져진 주인공 무라사키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던 만큼 이노우에 야스오 감독은 감각적인 영상으로 원작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살려내는데 주력한다. 순진한 표정 뒤에 살의를 감춘 주인공 무라사키 역을 맡은 오구리 슌, 그리고 무라사키의 '얼터 에고'적 존재인 13호 남자 역의 나카무라 시도우의 앙상블 연기는 일품이다. 나카무라 시도우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순수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는 주인공 역할을 했던 바로 그 배우. 이번 영화를 통해 완벽한 연기 변신이 가능한 배우임을 스스로 입증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 사이코 스릴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디션>의 미이케 다케시 감독이 우정출연했다. 이 작품의 엽기적 성향이 자신의 '급'임을 인정한 셈이다. 미이케 다카시의 '광팬'들이라면 영화 속에서 그가 맡은 단역을 쉽게 찾아 낼 것이다. 2005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이미 한번 국내에 소개됐던 작품이다.
. 천국은 기다려준다 감독 도키 요시마사
주연 이노하라 요시히코, 오카모토 아야 올해 메가박스 일본영화제는 유난히 멜로물이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을 영화는 바로 이 작품 <천국은 기다려준다>일 것이다. 일단 설정 자체가 그렇다. 어떤 분들은 지나치게 신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물론 <가을비의 일기>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사랑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 전통적 정서를 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사람들이 사랑하는 순간이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진부하며, 가장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닭살이고 촌극이지만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또 그것처럼 좋은 것도 없다. 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가? 종종 이런 영화가 자신의 애정 상황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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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기다려준다 |
영화 속 세 친구는 어릴 때부터 단짝이다. 여자 한 명. 남자 두 명. 할리우드 주류권 영화라면 당연히 여기게 삼각관계를 집어넣고 살짝 육체관계가 얽히게 한다. 예컨대 약간 시간이 지난 영화인 (사람들이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이 영화의 원제는 아예 '쓰리섬(Threesome)'인데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위험한 사랑의 줄다리기를 펼친다. 그리고 결국 한 남자는 게이로 커밍아웃한다. 할리우드 주류권에서 저 멀리 나간, 인디펜던트 영화에 속하는 <숏버스>는 연인의 삼각관계를 파격에 파격으로 다룬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삼각관계는 게이 남성 세 명 사이에서 펼쳐지며 서로가 육체관계를 맺는 과정이나 모습도 대단히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일본쪽은? 일본 주류영화계는 다분히 동화적이다. TV드라마적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진부하지만) 상당한 친화력을 지닌다. 복잡하지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본 신파 멜로드라마들은 착한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연애와 현실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대해 우리가 환상만큼은 가지고 살자는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라도 사랑의 환상에 빠져 살자는데, 그게 꼭 나쁠 건 없겠다. 그리고 정작 그런 얘기들을 보고 있으면 꼭 저게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멜로 드라마는 그만큼 흡입력이 강한 것이다. 자, 어쨌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히로키와 가오루 그리고 다케시다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인 히로시는 (일본에서 진보적 계열에 속하는) 아사히 신문사의 기자가 됐고 다른 한 명인 다케시는 대형 수산시장의 참치 도매업자가 됐다. 여자, 곧 가오루는 백화점 내에 있는 전통공예점의 매니저로 일한다. 세 사람이 각각 그같은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의 약속 때문이다. 세 아이는 서로 손을 잡고 삼각형을 만든 후 나중에 커서도 서로 삼각형 구조의 거리 안에서 직장을 갖자고 약속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한 사람이 가락동 시장에서 일하면 한 사람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또 한 사람은 양재동 어디쯤의 직장을 다닌다는 얘기가 된다.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한울타리에 있자는 얘긴데, 문제는 다케시가 어느 날 히로시 앞에서 가오루에게 청혼을 하면서부터 셋 사이에 균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도 사랑하지만 우정을 위해 히로시가 가오루를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약혼식날 다케시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히로시와 가오루는 계속해서 고민에 빠진다. 3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인 다케시를 두고 두 사람이 결합할 것인가. 다케시가 깨어 있다면 어떤 답을 줄까. 신기하게도 다케시는 딱 한번 정신이 돌아와 둘에게 해법을 준다. 어떤 것일까. 쉽게들 예상하신다고? 그래도 틀릴 부분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확인해 보시기들 바란다.
. 키친 감독 모리타 요시미츠
주연 가와하라 아야코, 마츠다 케이지 문학이 시대를 뛰어 넘는 통시성(通時性)이 강한 것이라면 영화는 그에 비해 동시대성(同時代性)이 강한 매체일 수밖에 없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이 1988년 작품이다 한들 지금 그 소설을 읽는 것에는 별 저항이 없다.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1989년에 이 소설을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이 영화로 만든 <키친>은 적응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 않겠는가. 20년 전 사람들이 입었던 패션의 트렌드, 헤어 스타일, IT환경 등등이 아무래도 '낡고' '올드해'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게 결코 옛날 영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현대적' 정서 때문이다. 문학과 영화가 종종 행복한 만남을 갖는 것은 그 안에 갖고 있는 보편성 때문이다. 요시미츠의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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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 가운데 하나인 <키친>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어떻게 공유하고, 또 어떻게 함께 극복해 나가는 가를 그린 내용이다. 주인공 미카게는 얼마 전 막 엄마를 여읜 상실감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의 남자친구(정말 그냥 남자친구)인 유이치 역시 어머니를 잃었다. 유이치가 어머니를 잃은 것은 미카게와 상황이 조금 다른데, 그의 어머니는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유이치만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의 아버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트랜스젠더가 된 것인데 유이치는 어머니를 잃었으되 어머니를 다시 찾은 셈이 됐다. 그렇다면 한편으론 아버지를 잃게 된 것일까. 소설 속에서 미카게가 유이치를 만나 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장면은 앞뒤 설명을 뚝 잘라낸들 그리 이해 못될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걸 영화로 가져 가 설명하기에는 보충설명이 많이 필요했을 듯싶다. 모리타 요시미츠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만 결국 소설 그대로를 따라 가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홀로된 집 주방에서 잠을 자던 미이케가 아침에 눈을 떠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는 오프닝 장면 후에 유이치가 찾아와 같이 밥을 먹자고 얘기하는 장면까지 영화는 마치 구름 속에서 유영하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미카게의 집과 달리 초현대적 시설로 꾸며진(그래서 다분히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유이치의 집 주방에서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약간 과장해서 얘기하면, 마치 두 사람이 근미래의 공간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이치가 미카게에게 얘기한다. "우리 어머니는 예전에 아버지였어." 미카게는 이 얘기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인다. 아이돌 가수를 기용한 청춘 코미디에서부터 야쿠자 액션영화, 로망 포르노까지 온갖 장르를 섭렵하되 작품마다 섬세한 감성을 개입시키는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은 이 작품 <키친>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국내에서 온전히 개봉되지 못했지만 그의 영화 가운데 야쿠쇼 코지와 구로키 히토미가 나왔던 <실락원>은 그의 여성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모리타 요시미츠는 하지만, 그런 영화 외에도 <검은 집>, <모방범> 등 미스터리 호러물을 만드는 등 전방위적인 작품성향을 보여 왔다.) 이 영화는 '여성적'이라기 보다는 '게이(gay)적'이다. 보다 따뜻하고 친밀하다는 의미다. 23살에 쓴 작품치고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몽환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영화 <키친>이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1980년대 일본영화의 초상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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