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발랄한 신예 감독인 미셸 공드리와 요즘 뭘 하고 사는지 통 소식이 없었던 프랑스 지나간 청춘의 심벌 레오 까락스, 그리고 우리에겐 너무 소중한 봉준호가 한 자리에 모였다. <도쿄!>라는, 가깝고도 먼 한 도시의 이름 아래 조우한 두 사람의 프랑스인과 한 사람의 한국인. 모두 나름대로 친숙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지만 이렇게 막상 이름을 늘어놓고 보니 조화로운 콜라쥬를 상상해보기에는 좀 힘든 개성을 지닌 멤버들이 아닌가? 예상대로 이 세 감독의 도쿄는 크게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영화는 그저 세 명의 감독에게 도쿄라는 키워드를 던져주고 나온 결과물인 서로 다른 영화 세 편을 한데 묶은 패키지에 가깝다.
▲ 도쿄! - 아키라와 히로코 |
이 영화의 결말은 사랑스러울 정도로 재치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독할 정도로 쓸쓸하기도 하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역시 우울함과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공드리의 전작 <수면의 과학>과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히로코가 오랜 연인과 나누는 장난스런 이야기들은 각자의 판타지에 관한 것일 뿐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일들은 세상에서 그다지 쓸모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뿐이다. 히로코는 친구와 남자친구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의 무생물로 변화한 뒤에 비로소 만족을 느낀다. 이제 그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을 염려 없이 남들과 접촉할 수 있고, 그녀가 하고 싶어했던 다른 소소한 취미생활들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로코는 타인에게서 분리된 뒤에야 자신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확신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주제의식 면에서, 공드리의 이 영화는 히키코모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봉준호의 영화보다도 더욱 히키코모리스러운 구석이 있다.
▲ 도쿄! - 메르드 |
공드리의, 약간은 우울하면서도 시종일관 경쾌한 터치로 만들어진 이 소품의 뒤를 잇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메르드)>는 강렬하다. <광인>은 오랜만에 까락스와 드리 라방 콤비의 '간지'가 폭발하는 까락스 특유의 영상시이다. 그것도 보통 시가 아니라 똥(메르드)과 꽃과 돈과 신처럼 선명하고 쎈 이미지와 언어가 난무하는 난폭한 낭만주의 시대의 프랑스 시 되겠다. 이 영화 속에서는 일본과 동양에 대해 엄청나게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지지만,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이 지독한 혐오는 특별히 일본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전반에 대한 혐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메르드와 볼랑의 기묘한 대화와 몸짓은 일견 굉장히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진지하고 서글퍼 보이는 나머지 이 사람들이 정말 날개를 잃고 땅에 떨어진 천사들 같다. 우리가 언어로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어떤 신적인 대화를 나누며 슬퍼하고 흐느끼는 게 아닌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하수구의 메르드는 폭력적인 광인인 동시에 어딘가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반문명적인 신성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신처럼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고 수도사처럼 자해한다. 아버지는 부재하는 동시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머니는 성녀였다. 그녀는 강간당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아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져 심장이 멈춘 뒤에 부활했다가 예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이내 사라진다. 메르드의 원초적인 신성성은 그가 알몸으로 꽃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나,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천사같은 아기라고 불렀다고 증언하는 부분에서 잠깐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마치 나는 너희들이 하수구로 흘려 보내는 찌꺼기들 속에서 이렇게 변했다고, 내가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면 그것들은 너희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뉴욕 편을 예고하면서 끝나는 경쾌한 마지막을 보면, 까락스는 신도 지쳐 늙어 죽어가고 성녀도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이런 혐오스러운 대도시들에서는 도시인들의 눈에 비치는 신의 아들조차 기괴하게 왜곡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드니 라방의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원체 범상치 않게 생긴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특이한 코스튬을 시켜 놓으니 한층 더 비범한 인상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메르드의 기묘한 모습과 그가 구사하는 메르드 어 때문에 도쿄가 가지는 지방색 자체는 영화 속에서 매우 희박하게 드러난다. 일본 사람들은 거의 중요하게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메르드와 볼랑은 때때로 아예 인간 같지도 않다.
▲ 도쿄! - 흔들리는 도쿄 |
무지막지한 까락스의 시를 통과하면 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비교적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이다. 까락스만큼의 '포스'는 없으나 봉준호의 영화답게 화면의 움직임과 나레이션의 흐름이 섬세하게 잘 조율되어 있는 가운데 조용한 파격의 요소들이 숨어있는 수작이다. 봉준호는 히키코모리와 지진이라는 일본적인 소재를 가져와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기 쉬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공드리의 영화와 정 반대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작품들 셋이 묶이긴 했지만 가장 강렬한 까락스의 영화를 사이에 두고 대칭 구도를 이루는 공드리와 봉준호의 영화는 이 패키지 상품의 구조에 기묘한 완결성을 가져온다.
영화의 첫 부분에 묘사되는 것처럼 히키코모리의 일상은 매우 체계적이고 일서정연하며 안정적이다.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 지진은 이런 히키코모리적인 특성의 반대편에 있는 현상이다. 처음으로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 히키코모리 주인공의 일상에 전환점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지진이 타인을 자신의 공간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물건은 정리할 수 있다. 잘못 끼워진 피자 박스나 무너진 책처럼 흐트러진 뒤에도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주인공의 집 안에서 정신을 잃은 피자배달부는 그렇게 주인공의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오이 유우의 몸에 달려 있는 버튼이다. 여성의 몸에 달려 있는 버튼은 오타쿠적인 은유인 동시에 아슬아슬한 페티시즘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클램프의 만화 <쵸비츠>에서는 여성처럼 생긴 컴퓨터의 성기 자리에 전원 스위치가 붙어 있고, 플레이스테이션의 유명한 광고 중 하나에서는 게임기 버튼 모양을 한 유두를 가진 남녀가 딱 붙는 상의를 입고 있다. 버튼이 달린 인체란 만지고 싶은 몸, 소통하고 싶은 몸이라는 성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이 발상은 영화 속에서 꽤 재미있게 기능한다. 피자배달부의 몸에 달린 버튼은 언뜻 보기에 게임기에 달려 있는 버튼처럼 편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게임기 버튼이 아니다. 사람의 몸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세이브도 로드도 할 수 없는 최종적인 조작인 것이다. 버튼을 누름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진이 발생한다고 하면 그 때 변화한 지형은 쏟아진 책들과는 달리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마지막에 감독은 죽이 되는 밥이 되든 그냥 눌러버려라! 하고 말한다. 설령 세상이 멸망하는 한이 있어도.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저 한 인간이 혼자 품고 있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과정의 은유일 수 있다. <아키라와 히로코>에서 불만족스러운 히로코의 세계는 그녀의 판타지에 의해 완성되고, <흔들리는 도쿄>의 주인공의 완성된 세계는 판타지에 의해 붕괴된다. 그렇게 관객은 현실에서 판타지로 여행하고, 다시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다케나가 나오토가 중간에 나와서 실컷 떠들다가 난데없이 자기는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장면이나, 다른 히키코모리들이 지진 때문에 밖에 나와서 우왕좌왕하다가 지진이 끝나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하게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 역시 감독의 오타쿠의 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장면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