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의 원작은 2005년 강풀 신드롬을 일으킨 강풀의 웹툰 <순정만화>이다. <아파트>와 <바보>가 강풀 원작의 웹툰을 제각각 영화화한 바 있지만 웹페이지에서와는 달리 영화관은 강풀에게 그렇게 관대한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순정만화>는, 추측하건대 마치 강풀이 <순정만화>로 데뷔했을 당시의 심정처럼 초심을 그대로 간직한 듯 기본기에 충실한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커플이다. 수영(이연희)과 연우(유지태), 숙(강인)과 하경(채정안). 에피소드 형식으로 매 화가 흘러가는 원작의 스토리에 그럴듯한 이야기의 흐름과 백그라운드를 제공하기 위해서, 영화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장소를 만들어내고 인물들 간의 관계성을 강화시켰다. 이를테면 원작에서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숙과 연우는 동사무소에서 나란히 근무하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술의 힘을 빌어 서로의 연애에 얽힌 애환을 나누기도 한다. 수영과 하경, 숙과 수영 역시 초반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런 세심한 설정은 두 쌍의 남녀 이야기가 부자연스럽지 않게 씨줄과 날줄로 얽히는 데에 일조한다.
▲ 순정만화 |
원작의 연우와 수영이 '아저씨'와 '여고생'의 안전한 스테레오타입을 따른 것처럼, 유지태가 연기하는 연우 역시 순박하고 착실한 30대 동사무소 직원이고 이연희의 수영은 예쁘고 발랄한 여고생이다. <순정만화>는 필름 카메라같은 영화다. 이제는 낡은 방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수하고 느릿느릿한 구식 연애. 이 연애는 서로의 마음을 프레임 속으로 조심스럽게 훔쳐보면서 점차 진전되며,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연애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는 카메라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필름카메라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고 있는 흔치 않은 고등학생인 수영은 우연히 하경을 지하철에서 보고 하경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예쁘다고 말한다. 하경은 사랑을 끝낸 후, 수영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시점이다. 동시에 이때 숙은 실연의 슬픔에 빠져 있는 하경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중반에 이르러서 아픈 사랑의 추억이 얽힌 하경의 카메라는 연우를 통해 수영에게 전달되고, 수영은 자신이 찍은 연우의 사진들과 함께 하경의 옛 사진들을 인화함으로써 카메라 속에 맺혀 있던 하경의 응어리진 사랑의 기억을 대신 뱉어낸다. <순정만화>에서 사랑의 끝과 시작은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서 움직인다. 연우는 수영의 사진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으면서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 개와 수영의 모습을 함께 담으려던 프레임은 어느새 수영에게로 클로즈업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연우는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이제는 한층 성숙해진 소녀를 보고 그녀에게 비로소 마음을 고백한다.
▲ 순정만화 |
두 쌍의 커플에게는 각기 사랑의 성취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연우와 수영의 경우에 그것은 띠동갑의 나이차이와 수영이 미성년자인 여고생이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연상연하 커플인 숙과 하경 사이에는 나이차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운명처럼 여기고 사랑했던 예전 남자친구에게 영문을 모르고 차인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하경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숙은 아직 소년 티가 묻어나는 순수함과 활발함으로 하경을 보듬으려 애쓰고, 하경은 숙에게 상처를 줄 것을 걱정하면서도 숙에게 의지한다.
하경의 남자친구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은 우연적인 동시에 전형적이다. <순정만화>의 세계는 착한 사람들의 세계다.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사랑에 있어 장애물로 작용하는 수영의 엄마나 하경의 예전 남자친구 역시 드라마틱한 클라이막스를 만들기에는 너무도 이타적인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 이 작은 동네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탁소 부부와 동네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비롯해서 모두 지나칠 정도로 착하다. 주인공인 하경과 숙, 그리고 연우와 수영 역시 서로를 배려하면서 어떻게 이 사랑을 움직여나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30대 아저씨의 집에 이팔청춘 여고생이 핫팬츠 바람으로 누워 자고 있어도, 혈기왕성하고 제멋대로인 청년 숙이 연약해보이는 하경을 몰아붙여도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한없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전한 캐릭터의 틀 속에서 배우들이 개성적인 연기력을 발휘한 여지는 줄어든 반면 관객들이 민망한 연기를 목도할 위험 역시 사라졌다. 유지태는 아주 편안하고 평범하게 연우를 연기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다소 우려되었던 이연희의 연기나 <순정만화>가 첫 데뷔작인 강인의 연기 역시 딱히 거슬리지 않게 영화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채정안의 하경은 <커피프린스>에서의 한유주와 닮았다. 속을 알기 어려운 성인 여자. 더 이상 마냥 인형같이 예쁘지만은 않은, 약간의 세월과 그 동안 쌓인 그녀만의 이야기들이 동시에 묻어나는 채정안의 얼굴은 이런 역할에 제법 잘 들어맞는다. 수영의 친구를 연기한 소녀시대 멤버 수영의 연기 역시 발랄하고 경쾌하다. 특히 주인공들 중 가장 명랑한 성격으로 극중 분위기를 방방 띄우는 강숙 역을 맡은 슈퍼주니어 출신 강인의 약간 미숙하면서도 노력이 엿보이는 연기는 극중 캐릭터의 성격과도 잘 어울리면서 좋은 기분을 자아낸다. 강인의 극중 비주얼도 원작의 강숙과 거의 비슷해서 원작의 팬들도 만족할 수 있을 듯 싶다.
<순정만화>의 미덕은 강풀의 순박한 감성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상물 속에 이상적인 형태로 재현하려 애쓴 감독의 노력에 있다. 영화 <순정만화>의 성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웹툰이라는 가장 현대적인 매체를 통해 그만의 복고적이고 우직한 감수성을 네티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한 강풀 표 만화가 또 다른 형태로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음 차례로 영화화될 강풀의 만화는 무엇이 될까? <26년>이 사실상 엎어진 지금, 조심스럽게 <타이밍>을 밀어본다. 일상 속에 숨어있는 초능력자들의 은밀한 활약이라니, 제법 영상화가 땡기는 소재 아닌가? 물론 이때까지의 국내산 초능력 영화 전적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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