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턴 프라미스 |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창조물, 즉 인간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하듯, 인간과 뱀파이어, 즉 민간인과 러시아 마피아의 경계는 <이스턴 프라미스> 속에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 듯 보이다가도 금세 그 벽을 허물어내며 우리가 보는 세상을 왜곡시키고 또한 바로잡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도대체가 이 런던이라는 동네에는 러시아 이민자밖에 안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러시아 이민자 출신인 주인공부터가 인간인 척 하는 뱀파이어 혈통인 것이다. 안나의 삼촌은 다른 인종끼리는 결합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쯤 되면 이건 인종이라기보단 종족 개념에 가깝다. 평범한 이발소의 풍경이 유혈의 무대로 전환되는 충격적인 첫 장면에서처럼, 누가 뱀파이어이고 누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인간들의 틈새에서 <이스턴 프라미스>에 존재하는 밤과 낮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서로의 세계는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종속되어간다. 우리가 용납하든, 용납하지 않든, 어둠의 지배자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사실 이 세계는 칼질 한 번에 무너질 정도로 불완전한 뱀파이어들의 소굴인 것이다.
많은 뱀파이어들이 그렇듯이, <이스턴 프라미스>의 뱀파이어들 역시 생식 능력이 없다. 그들은 파괴로서 세상을 유지한다. 반면 인간은 창조로서 세상을 유지한다. 니콜라이를 비롯한 보리 v. 자콘 파의 멤버들은 전자를, 안나와 타티아나는 후자를 대표한다. 안나 역시 뱀파이어의 불모의 피를 이어받았고(안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은 영화의 초반에 암시된다), 아이의 죽은 어머니인 타티아나도 사후에 아이를 잃을 운명에 처하지만, 이 두 러시아 여성이 기묘한 삶과 죽음의 유대 속에서 동시에 생명을 수태함으로써 이들은 어둠 속에서 구원과도 같은 생명을 낳고 뱀파이어 무리의 불행한 숙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끼릴 역시 종족을 잘못 타고난 개체 중 하나이다. 결국 그도 그만의 방식으로 아이를 지키게 되는데, 그건 끼릴이 근본적으로 어둠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끼릴이 러시아 이민자 집단이 요구하는 전형적인 남성성을 지닌 남성이 아닌 호모섹슈얼이라는 것은 꽤 흥미로운 점이다.
▲ 이스턴 프라미스 |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는 재미있는 한 쌍이다. 이 두 영화는 절묘하게 페어를 이루고 있다. 폭력에 매혹되어가는 남자와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남자. 위험한 척 하는 좋은 남자와 착한 척 하는 나쁜 남자. 비고 모텐센이 가진 악당과 선인의 두 얼굴은 크로넨버그의 근작 두 편에서 유난히 빛을 발한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보다는 장르영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갱 영화 속에서든 리얼리즘 드라마 속에서든 한결같이 폭력의 이율배반적인 아름다움과 그 원죄를 짊어진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뱀파이어이고, 언제든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체로, 여성들이 남성보다는 뱀파이어 피에 좀 더 내성이 있는 편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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